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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포트리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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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다빈치 코드'로 유명한 댄 브라운은 소설 '디지털 포트리스(Digital Fortress)'에서 e-메일 도.감청이라는 흥미로운 소재를 등장시켰다.

무대는 전 세계를 상대로 도.감청 등 전자 첩보활동을 벌이는 미국 국가안보국(NSA). 1980년대 말 NSA는 인터넷과 e-메일의 출현이라는 사이버통신혁명을 목격한다. 테러리스트.스파이.범죄자들이 도청을 피해 전화 대신 암호화된 e-메일을 통신수단으로 이용한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e-메일은 우편물의 안전성과 전화의 신속성을 갖춘데다 공중파를 타지 않아 정보기관의 도.감청 추적을 따돌릴 수 있었다.

국가 안보 위기와 테러 위협에 직면한 NSA는 아무리 난해한 e-메일 암호라도 단 몇 분 안에 해독하는 수퍼컴퓨터 '트랜슬터'를 개발한다. 마음만 먹으면 지구촌 사이를 오가는 개인들의 모든 e-메일을 몰래 들여다볼 수 있는 '빅 브라더'가 태어난 셈이다.

이에 개인의 사생활 침해에 반발하는 NSA의 한 프로그래머는 트랜슬터 조차 해독할 수 없는 암호 생성 프로그램인 '디지털 포트리스'를 만들어 대항한다. 이를 둘러싼 음모와 두뇌싸움이 소설의 줄거리다.

이 소설처럼 NSA는 전 세계를 감시하는 도.감청 시스템 에셜론(Echelon)을 통해 전화, e-메일, 인터넷 다운로드, 위성 전송 등 매일 30억 회 정도의 통신을 가로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e-메일 도.감청이 범죄수사의 중요한 기법으로 떠올랐다. 국내에서 하루에 오가는 e-메일은 약 12억 통으로 추산된다. 지난해 경찰이 개인의 e-메일 등 인터넷 로그 기록 등을 조회한 건수는 4만8000여 건에 달했다.

수사.정보 기관이 테러 방지와 산업스파이 색출을 위해 용의자들의 e-메일을 합법적으로 뒤지는 것은 탓할 게 없다. 국경을 넘나드는 21세기형 컴퓨터 범죄에 대처하려면 우리도 NSA 같은 조직을 생각해 봐야 한다.

하지만 국정원(옛 안기부)의 불법 도청 사건은 국가 기관이 내 e-메일을 훔쳐볼 수 있다는 불쾌한 상상부터 떠올리게 한다. e-메일 도청을 차단하는 개인용 디지털 포트리스가 더 필요한 시대가 올지 모를 일이다.

고대훈 사건사회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