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분수대

고생했다, 장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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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이영희 기자 중앙일보 기자

2014년의 마지막은 가슴 뭉클한 글을 소개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고 싶다. 연말 SNS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한글을 처음 배운 할머니들의 자작시다. 까막눈으로 60년 넘게 살다 글을 깨친 할머니들은 그리운 엄마에게, 먼저 떠난 남편에게, 가까이 있어도 보고 싶은 자식들에게 마음을 전한다. 아들에겐 “나한테 태어나서 고생 많았지”라고 쓰고, 남편에겐 “여보 사랑합니다. 당신에 할망구”라고 서툰 한글로 적는다. “좋은 음식도 못 잡수고 멀고 먼 황천길을 떠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에 “좋은 옷 입어도 어머니 생각, 좋은 음식 먹어도 어머니 생각”이다.

 다 늙어 글을 배우면 뭐 할까. 답이 여기 있다. 강옥자 할머니는 ‘내 친구는 소’라는 시에서 어린 시절을 함께한 소를 떠올린다. “소야 너는 좋겠다/ 말을 못하니/ 글을 몰라도 되니/ 차라리 나도 소가 되고 싶었다.” 소로 태어나는 게 차라리 나았겠다며 들에 앉아 울던 소녀는 이제 글을 배웠다. “60년 소처럼 살아온 난/ 이제 멍에를 벗고/ 맘껏 배움의 들판에서/ 꿈을 뜯는다.” 평택 시민아카데미에서 한글을 배운 임남순 할머니. 여자가 무슨 공부냐고 호미를 들고 쫓아온 엄마 때문에 학교를 못 다녔다. “까막눈으로 결혼해 시부모님에 아홉 식구/ 시어머니 병수발 10년/ 시아버지 병수발 또 10년.” 그 고단했던 삶에 배움은 선물이었다. “힘들고 지쳐 포기하고 싶었던 날들/ 돌아보면 외롭고 쓸쓸했던 나의 삶을/ 한글이 위로해주었다/ 한 글자 한 글자 배울 때마다/ 고생했다 장하다 따뜻하게 어루만져주었다.”

 올해 읽은 그 어떤 책 속의 글보다 감동적이다. 한 살 더 먹는다는 건 서글픈 일이지만, 또 그렇게 우울해하지만은 않아도 괜찮겠다 싶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책으로 고른 건 독일의 철학자 빌헬름 슈미트가 쓴 『나이 든다는 것 늙어간다는 것』(책세상)이었다. 그는 나이가 든다는 건 인생의 즐거움을 진짜 즐거움으로 누릴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혹시 전 생애를 통해 체념할 수밖에 없었던 삶이 있었다면, 지금이 바로 그것에 대해서 숙고해볼 딱 좋은 때다.”

 다사다난(多事多難)이란 말로 모자란 한 해가 간다. 많은 이들을 떠나보냈고 많이 울었던 해였다. 그래도 우리 앞에 놓인 미지의 새해,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놀라운 기쁨이 몸을 숨긴 채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고 상상해본다. 그래서 오늘은 한 해 동안 수고한 내가 나의 등을 두드리며 “고생했다, 장하다” 격려하고 싶다.

이영희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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