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소량구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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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배추 반통, 무우 한 개, 파 한단, 그리고 저녁식사 뒤에 먹을 사과 한알.
맞벌이 주부 김영숙씨(27·서울 강남구 잠실동)가 쇼핑한 장바구니의 전부다. 남편과 단둘뿐인 미니 식구답게 미니 아파트에 장바구니도 초 미니다. 김씨는 결혼 초에 김치도 배추 2∼3통을 사들여 1주일 분을 담갔고 시장에 나가면 반찬감을 주섬주섬 담아 냉장고를 가뜩 채워야 직성이 풀렸었다.
그러나 남편이 회사 일로 저녁을 밖에서 하는 일이 잦으면서부터 혼자서 남은 음식을 치우기도 지겨워 먹는 것 보다 버리는게 많았다. 이 때부터 꼭 필요한 양만 사들이는 소량구매습관이 생긴 것이다.
핵가족화와 더불어『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가족계획이 펼쳐지고 미니 식구 가정이 늘면서 소량 판매-소량구매의 생활 패턴이 어느새 우리생활 깊숙이 파고들었다.
배추뿐만 아니라 오이·당근· 감자·양파·콩나물·고추·상치 등의 판매 단위가 한 두근에서 g으로 바뀌었고 4분의 1쪽 짜리 수박도 등장했다.

<이젠 g화 시대로>
사과나 배 등 과일도 한 두개씩 비닐로 포장돼 슈퍼 마키트에 진열되고 있다. 이른바 그램화 시대에 접어든 것이다.
판매 단위의 소량화 현상은 70년대 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고 슈퍼마키트가 유통계의 총아로 등장하면서 이미 예고했던 것. 생활의 편리를 쫓아 꾸며진 아파트 주거 형태는 많은 식품을 한꺼번에 저장하기도 곤란한데다 알맞는 양을 간편하게 조리해 먹는 생활양식으로 변하면서 상품 판매도 여기에 발맞춰 소량판매가 성행하게 된 것.
또 예전 같으면 식탁에 5∼6명이 둘러앉아 떠들썩했으나 요즈음은 3∼4명의 단출한 자리로 바뀌었다
농수산물 외에도 수프·죽·커리라이스·국수 등 인스턴트 식품도 종래 5인분에서 2∼3인분이 나와 인기를 끌고 있다.
K, N 등 유명 제과 메이커들도 81년부터 식빵에 방부제를 거의 안 넣는 대신 종전의 절반크기(3백50g)로 내놓고 있다.
손님 기호에 맞추고 곰팡이를 막기 위해서는 소량판매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이들 메이커들은『요구에 따라 조금씩 물량을 늘리다 보니 이제는 큰 식빵과 반반 정도 팔릴 경도로 수요가 늘었다』고 말했다.
D수산은 작년 봄부터 굴비를 한 마리씩 비닐 포장해 팔고 있다. 고객들이 한 두름으로 내놓으면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기 때문이다.
주부 이 모씨(37·서울 강남구 반포동)는『아파트에서는 냄새도 나고 걸어둘 장소도 마땅치 않아 마른 생선은 먹고 싶어도 피하는게 보통이었으나 이제는 보관걱정도 없어 식탁에 자주 올린다』고 했다.

<보관불편·낭비 덜어>
H유통 김창우 차장은『주부들의 요구가 선도와 세분된 식품이니 지금은 소 포장 상품에 신경을 더 많이 쓰고 있다』고 말했다.
영동의 H유통 1백평 남짓한 가공실에는 새벽 6시부터 80여명의 직원들이 소 포장에 손길이 쉴 사이 없다. 씻고 다듬고 자르고 난 후 소 포장하기가 무섭게 트럭에 실려나간다. 서울시내 21개 각 지점에 공급하는 상품은 하루 3·5t트럭 20대분 연 70여t
소량화 경향은 식품뿐만 아니라 일반 공산품에도 영역이 넓어지고 있다. 또 오퍼상에 다니는 오선희 양(21)은 직장3년생. 핸드백 속에 장난감같은 자그마한 화장품들을 넣고 다닌다. 볼펜보다 약간 굵은 립스틱, 반쪽 짜리 아이섀도, 볼연지 등.
모두 미니 화장품들이다. 『직장생활 초년에는 화장품만으로 핸드백이 가득 찼으나 이제는 보고 싶은 책 한 두권은 넣고도 오히려 여유가 있다』고 했다.
미니 화장품이 시중에 첫 선을 보인 것은 재작년부터.
직장여성과 여대생 등 활동적인 젊은 여성들이 늘어남에 따라 시중에 등장했다.
미니 화장품이 처음 선을 보였을 때는 립스틱이나 볼연지 등이 고작이었으나 요즘은 용량이 반밖에 안 되는 35g짜리 영양크림에서부터 파운데이션·매니큐어 등에 이르기까지 모든 화장품이 미니화 됐다.

<정겨운 풍경 사라져>
T화장품회사 조경휘 과장은『미니 화장품이 우선 간편하고 오래 사용해도 굳어버릴 염려가 없어 낭비가 적다』며『기초화장품보다 립스틱 등 부분 화장품이 품목마다 월 2만개이상 팔리고있다』고 말했다.
시장에서 물건을 적게 사면 공연히 미안스럽던 마음은 소량 판매시대의 등장으로 이제는 옛 일이 돼버렸다. 낭비와 번거로운 것을 피하고 규모에 맞춰 사들이는 소량구매는 생활의 합리화와 궤를 같이하는 당연한 추세.
그러나 음식상을 푸짐하게 차려놓고 친척과 이웃들이 함께 모여 떠들썩하게 웃고 즐기던 정이 넘치는 풍경이 사라지는 것 같아 어쩐지 씁쓸하기만 하다.<장성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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