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미료는 NO … 절망을 날것 그대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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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좋은 작품이란 그늘진 곳에 있어도 빛이 나는가 보다. 창작 뮤지컬 '밑바닥에서'(연출 왕용범.작곡 박용전)는 그런 작품이다. 6월 첫 테이프를 끊은 뒤 8월 2차 공연을 시작해 이젠 장기 공연 체제에 돌입했다. 좌석은 비좁고 등받이도 낮지만 관객의 반응은 뜨겁다.

이 공연의 미덕은 언젠가부터 뮤지컬계에 퍼져 있던 '뮤지컬은 재미있고 웃겨야 한다'는 속설을 파괴한 것이다. 즐겁기는커녕 등장 인물들은 처절하게 비극으로 치닫는다.

매춘부, 알코올 중독자인 무명 배우, 사기 도박단 등 사회 하층민들은 소박한 희망에 한껏 부풀었다가 결국 헤어나올 수 없는 운명적 굴레에 깊숙이 빠져 들어간다. 때론 처연하고 때론 비극적인 상황에 객석은 숨죽인 흐느낌으로 화답한다. 환호와 폭소만이 뮤지컬의 전부가 아님을, 그러면서도 충분히 관객과 소통할 수 있음을 이 작품은 똑똑히 보여준다.

'밑바닥에서'는 '어머니'로 유명한 러시아 극작가 막심 고리키의 '밤 주막'이 원작이다.

그러나 원작의 체취는 시대적 배경과 이름에만 묻어날 뿐,상황은 철저히 현대적으로 재가공된다. 원작의 음침한 지하실은 시끌벅적한 선술집으로, 고상한 철학자는 때묻지 않은 여급으로 바뀐다.

무엇보다 죽은 뒤에야 언니가 사실은 어머니였다는 걸 알게 되는 미혼모 이야기는 한국적인 현실을 끌어내고 싶은 제작진의 의도가 강하게 드러나는 지점이다.

슬픔이 고동치는 장면은 모두 말이 아닌 쓸쓸한 노래로 표현했다. 모두 12곡의 순수 창작곡이 나온다. 초반 스토리가 다소 산만하고, 페페로와 나타샤가 서로 사랑하게 된 계기 등 불분명한 점이 없지 않지만 10명의 등장인물은 각각 살아 숨쉰다. 딱히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 수 없을 정도다.

특히 서울대 성악과 출신으로 타냐를 연기한 신효선(27)은 차세대 뮤지컬 스타로 발돋움할 수 있는 충분한 역량을 보여준다.

이 작품에서 소극장 창작 뮤지컬이 대형 수입 뮤지컬과 경쟁해 살아남을 가능성을 보았다면 지나친 칭찬일까.

최민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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