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9화 육사졸업생들(80)|5기주체 중도탈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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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장도영일파 44명 반혁명사건」으로 5기 혁명주체들이 대부분 거세된 것은 5기의 불운이었을뿐 아니라 우리 군으로서도 손실로 작용한 아쉬움이 있다.
4년제 정규과정 이전의 사관학교 l∼10기 가운데 5기생은 어느 면으로나 출중한 바가 많았다.
무엇보다 이들의 고르고 높은 학력은 그 이전이후의 어느 기보다 우월한 밑바탕이었다. 5기생 입교자는 모두가 구제 5년과정 중학이상 학력이었을뿐 아니라 대학재학중 학업을 팽개치고 「뜻한바 있어」 입대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5기 가운데 1번으로 입교한 김익권장군(소장)은 서울대법대, 2번 최철장군(소장)은 서울대상대를 다니다 입교했었다. 그밖에도 일제때 성적이 우수한 사람들만이 갈수 있었던 대구·평양 등 사범학교나 각지방의 명문학교 출신들이 많이 모여 5기는 처음부터 제제다사의 면모였다. 또 이들은 대부분 과거의 군사경력이 없는 민간인이었다. 일군·만군 등 과거의 물이 들지 않았다는 사실은 독자적인 「우리군대」의 전통형성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했다.
9개월이라는, 당시로선 파격적으로 긴 교육기간은 높은 학력이 뒷받침돼 성과를 배가했다. M1 등 미제무기가 처음 공급돼 제대로 훈련과 교육을 받을수 있었다.
이런 여러조건으로 마땅히 우리군의 한시대를 맡을 것으로 기대됐던 5기생들이 막 꽃필 무렵 된서리를 맞은 것이다.
그 여파로 「참모총장감」이라고 지목됐던 재목이 장성에서 예편하고 장재를 지니고도 영관으로 퇴역한 인재들이 많다는 점은 여러사람이 인정하는 바다.
이점에서 5기생들은 서로가 서로를 인정해주고 아까와하는 유별난 동기애로 지금껏 지내온다.
장도영사건으로 혁명주체를 대부분 잃은 5기생들은 얼마 뒤 원충연대령의 쿠데타음모사건에도 2명이 연루, 군복을 벗었다.
장경석준장(62·함북청진·36·8사단장)과 이춘광대령(56)이 그 주인공이다.
장장군은 포병창설요원으로 가 포병발전에 공이 많았었다. 내가 2군사령관시절 36사단장으로 휘하에서 일했는데 가자마자 부대운영에 혁명을 일으켰다. 5명을 한조로 이른바 「소조순환식」 정훈교육을 창안, 실시했다.
전사단을 5명 세포로 조직해 교육·훈련·내무생활 등 각 방면에서 자발적인 참여경쟁을 유도한 것이다. 장교의 명령이 아니라 사병들의 자치적인 결의가 부대를 끌고가는 민주적 군대운영의 실험이었다. 결과는 놀라왔다. 한달 도망병이 70∼80명이나 되던 문제사단이 몇 달만에 도망명은 2∼3명으로 줄고 모범사단으로 바뀌었다. 장장군은 형식적인 일석점호도 폐지해 버렸다. 자신의 운영방식을 「전사병의 사단장화」라고 말하며 「강군육성의 요체」라고 역설하곤 했다.
나는 그 성과를 듣고 장장군과 동기생인 군단작전참모 박주근대령을 보내 상세한 조사를 해오게한 뒤 전2군에 이 방식을 보급할 계획이었다. 곧 1군사령관으로 자리를 옮기는 바람에 실현을 보지 못했다.
장준장은 나중 8사단장으로 옮겨 역시 같은 방식으로 「정예사단」을 만들어 놓았으나 뜻밖에 쿠데타음모연루로 군을 떠나게 됐다. 원충연대령측에서 서울근교 무력부대 포섭을 위해 안모대령(7기)을 보내 접근해 왔다고 한다. 장준장은 말도 못꺼내게 일축해 보냈는데 그 정을 알고도 보고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65년5월 조사를 받고 예편해야 했다.
예편원을 써던지고 나온 뒤 2년여 낭인생활을 하다가 코오롱감사로 들어가 6년을 일했다.
낭인시절 불교에 귀의했고 건강회복을 위해 요가를 배우기 시작한 것이 계기가 돼 요가를 중심한 건강법에 일가를 이루어 요즘은 유도대학·수도전기공고등학교에 출감, 요가를 가르치며 자연식보급·국민건강증진운동을 펴고있다.
이춘광대령은 모의에 가담한 혐의로 징역형을 받고 복역하다 형집행정지로 나온 뒤 운수사업에 손을 대 성공, 벤츠를 타고 다닌다고 들었다.
5기들은 다수가 65년 3월게 예편했다.
5기생들은 이를 8기등용을 위한 조치라고 또 한번 불만을 터뜨렸다. 고참대령으로 장성진급을 못하고 옷을 벗은 사람도 많았다.
당시 민기식참모총장은 퇴역 5기장성들을 위로하는 뜻으로 육군회관에 초대, 파티를 열었다. 이 자리서 5기의 선두주자이며 동기 회장격인 이룡소장 등 몇몇이 술기운을 빌어 민총장에게 다소 거친 합의를 한일이 있었는데 이것이 문제가 됐다. 이장군도 예편을 했고 민대장도 얼마후 참모총장직을 물러났다.
주월사령관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던 채명신장군도 2군사령관으로 있다가 72년 중장으로 예편했다.
5기생 장성진급자는 대장 1명, 중장 4명(공군2명포함), 소장 23명, 준장 31명(추서2명포함)이다.
정승화·김학원장군만이 제3공화국 말기까지 군에 남아 10·26 당시 참모총장·1군사령관으로 있다가 12·12로 물러났다.<계속><장창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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