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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는 싫다…내 이름을 불러다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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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언니는 '정다운' 호칭이다. 만약 나보다 어린 어떤 여자가 나에게 '언니'라 불러도 되느냐고 물어 온다면 그 여자는 나에게 꽤나 정다운 감정, 말하자면 가족관계에서 동성(同性)의 손위 동기에게 가질 법한 친밀감을 느꼈다고 봐도 된다. 그런데 요 몇 년 사이 언니는 나이와 성별을 초월해 여자를 '만만하게' 부를 수 있는 호칭으로 급속히 변질되고 있다. 남성이 여성을 부를 때도 애용된다. 음식점에서 나이들고 점잖은 남성이 여성종업원을 언니라 부르고, 길거리 노점상도 지나는 여성들을 언니라 부르며 호객한다.

오늘날 언니가 이렇게 나이와 성별을 떠나 광범위한 사랑을 받는 어휘로 싱싱한 생명력을 발휘하게 된 까닭은 우선적으로 언니라는 말이 정답고 따스하며 친밀한 모성(母性)의 말맛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요즘은 언니라고 하기엔 계면쩍은 연배의 여성을 '만만하게' 부를 수 있는 호칭으로 자리 잡은 '이모'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런 '정다운' 호칭들이 권위와는 동떨어진 그 '만만함'때문에 쉽사리 남용되고 지속적인 가치하락을 겪고 있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 관련 언어의 운명은, 남성보다 훨씬 쉽게 성적 존재로 환원되거나 성적 모욕에 노출되거나 성적 공격을 받는 여성의 운명과 유사하다. 현재 언니의 여러 용례 중에는 '성매매 여성을 완곡하게 이르는 말'도 들어 있다. 대한민국 여성이면 누구나 듣기 싫어하는 말이 된 '아줌마'도 기혼 여성의 여성성에 대한 지속적인 가치 폄훼의 한 사례라 할 수 있다.

남남인 여자를 부를 때 언니, 이모, 어머니라는 친족 호칭이 애용되는 추세와 달리 남남인 남자를 부를 때는 여전히 '선생님' 혹은 '사장님'같이 사회적 권위와 밀접한 호칭이 선호되는 것 같다. 선생님이란 호칭은 그 사용 범위가 엄청나게 넓어짐으로써 군사부일체 시대의 절대적 위상은 어느 정도 상실했지만 아직도 미용실이나 음식점의 언니들과는 차원이 다른 권위를 자랑하고 있다.

그렇다고 모든 상대를 선생님이라 부를 수도 없고 부르기도 싫으니, 부르는 나와 불리는 상대방이 함께 만족하는 맞춤한 호칭을 찾기란 여간 골치 아픈 일이 아니다. 내남 없이 이름 부르는 걸로 호칭을 대신하면 얼마나 편할까 싶지만, 될성불러 뵈지 않는다. 남자들은 흔히 이름 대신 자(字)나 호(號)를 부르고 이름조차 없는 여자들은 가족관계를 기준으로 ○○댁 혹은 ○○어미로 불러온, 유난히 이름 부르기를 꺼리는 전통문화가 엄연히 버티고 있는 탓이다.

그래도 웬만하면 이름을 불러주는 쪽으로 호칭 문화가 바뀌었으면 싶다. 그런 면에서 나는 '친절한 금자씨'가 좋다. 금자씨는 삼순이보다 별로 나을 것도 없는 그 이름에 최고의 자긍심을 보였다. 심지어 딸에게도 '금자씨'라고 부를 것을 주문할 정도로.

박정애 소설가. 삼척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