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뱃값 인상" 다음날 "주민세 인상" … 전략없는 아마추어정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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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지난달 초의 일이다. 새누리당의 한 의원이 안전행정부(현 행정자치부) 고위 공무원에게 연락해 국회에서 만나자고 요청했다. 공무원연금 개혁 업무를 상의할 일이 있어서였다. 하지만 이 공무원은 “바빠서 국회에 갈 시간이 없다”고 거절했다고 한다. 해당 의원은 “너무 황당해서 말이 안 나왔다”고 혀를 찼다.

 박근혜 정부 2년차가 저무는데 공직 사회가 뭔가 이상하다. 메시지 관리 기능이 작동하지 않는가 하면 공무원들의 보신주의도 보이지 않게 번지고 있다.

 정홍원 총리는 24일 국가정책조정회의를 주재하며 장관들에게 “아무리 정책의 취지가 좋더라도 정책 판단이 소홀히 되면 정책 혼선과 정부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진다”고 쓴소리를 했다. 내년에 사학·군인연금 개혁을 추진하겠다고 지난 22일 발표했다가 하루 만에 번복한 ‘사건’ 때문이다.

 공무원연금 개혁을 성사시키기에도 벅찬 상황에서 군인·사학연금 개혁까지 동시에 추진하게 되면 군인과 사립학교 교사까지 정책 저항집단으로 추가하게 된다. 새누리당은 “기가 막히는 심정”(김무성 대표)이라며 반발했고 기획재정부가 “담당 공무원의 실수였다”고 해명해 해프닝은 일단락됐다.

 문제는 전략적·정무적 판단을 고려하지 않은 정책 추진을 정부가 반복하고 있다는 점이다. 보건복지부는 지난 9월 11일 담뱃값 2000원 인상안을 발표하면서 “국민 건강을 위한 일”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다음 날 안행부는 덜컥 주민세·자동차세 인상안을 발표했다. 비판 여론이 커졌다. “증세는 없다”던 정부가 조세 저항이 작은 담뱃값 등을 볼모로 ‘꼼수 증세’를 한 게 아니냐는 지적이 잇따랐다. 보다 못한 청와대는 “기재부와 제대로 상의도 안 하고, 주민세는 시·도지사들의 인상 요구가 있었는데 왜 그걸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중앙정부가 비판받게 만드느냐”고 안행부를 질책했다. 결국 박근혜 대통령이 나서 “모든 국가가 담뱃세를 50% 인상하면 3년 내에 흡연으로 인한 사망자가 1100만 명 감소할 것”이라며 국민의 협조를 구했다.

 지난달 13일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된 ‘실업률 10.1%’ 통계도 마찬가지다. 통계청이 전에는 실업자로 분류되지 않던 취업준비생, 경력단절여성, 고시준비생 등을 사실상 실업자로 보고 ‘체감 실업률’(고용보조지표)을 측정했더니 10.1%였다는 자료였다. 10월 실업률 3.2%의 세 배가 넘게 실업이 늘어난 것처럼 착시효과를 일으킬 수 있는 내용이었다. 일자리 늘리기를 강조하던 박 대통령을 머쓱하게 만든 자료였다. 당시 청와대 관계자는 “기재부가 청와대에 보고도 안 하고 통계청에 자료를 줘버렸다”며 “아무리 정책을 열심히 추진해도 그런 게 보도되면 얼마나 타격이 크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유성진(정치학) 이화여대 교수는 “정책이 국민에게 미치는 영향이 큰데도 아마추어처럼 운영되고 있다는 게 문제”라며 “정책의 방향성을 잡아주거나 문제가 생겼을 때 책임지려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웃지 못할 일이 반복되고 있다”고 말했다.

 일각에선 세월호 참사 뒤 관피아 혁신과 공무원연금 개혁이 추진되면서 공무원들의 ‘사보타주(태업)’가 확산된 결과라는 진단도 있다. 여권 인사들은 공무원들의 비협조를 토로하곤 한다. 청와대 관계자에 따르면 공무원연금 개혁 주무부처였던 안행부는 장관이 기자간담회를 열어야 하는데 청와대 측에 “우리가 부르면 안행부 기자단이 안 오니 청와대에서 모아달라”는 황당한 요청을 한 일도 있다고 한다.

허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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