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전문기자 칼럼

웰빙 열풍 유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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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나는 단지 아주 나쁜 번호를 뽑았을 뿐 장애인이 아니다'.

1995년 12월 8일까지만 해도 장 도미니크 보비는 출세 가도를 달리던 사내였다. 91년 39세의 젊은 나이로 세계적인 여성잡지 '엘르'의 편집장에 올랐을 정도다. 그러나 그날 퇴근길 뇌혈관이 터지는 뇌졸중에 빠졌다. 뇌졸중 가운데서도 가장 극악무도한 '자물쇠 증후군'에 걸렸다. 마치 자물쇠로 채우듯 인체의 기능이 한꺼번에 정지하는 병이다. 왼쪽 눈과 귀로 보고 들을 수 있을 뿐 사지마비는 물론 혀까지 마비돼 말을 할 수도, 음식물을 씹어 삼킬 수도 없다. 실제 자물쇠 증후군은 의식이 남아 있는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병으로 악명이 높다. 그러나 그는 굴복하지 않고 병석에 누운 채 왼쪽 눈꺼풀을 20만 번이나 움직여 가며 '잠수복과 나비'란 감동적인 베스트셀러를 써낸다.

웰빙 바람이 드세다. 신문과 방송은 물론 홈쇼핑과 전단지까지 웰빙이란 단어로 도배되다시피한다. 의학전문기자로서 국민이 웰빙에 관심을 갖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과유불급(過猶不及)이랄까. 현재 웰빙 열풍은 분명 지나친 감이 있다.

혈당을 보자. 97년 당뇨 진단 기준이 바뀌었다. 공복 시 혈당 140 ㎎/㎗ 이상에서 126 ㎎/㎗ 이상으로 엄격하게 바뀐 것이다. 예컨대 공복시 혈당 130 ㎎/㎗인 사람은 97년 이전엔 정상이었으나 이후부터 졸지에 당뇨환자가 된 것이다. 현재 혈당 기준은 더욱 까다로워져 공복시 100㎎/㎗ 이상이면 비정상 혈당이라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이 기준대로라면 성인 4명 중 1명은 혈당에 관한 한 불합격점을 받을 정도다. 복부비만도 마찬가지다. 키와 몸무게와 상관없이 남자 90㎝ 이상, 여자 80㎝ 이상이면 복부비만이다. 이 기준대로라면 성인 3명 중 1명은 복부비만에 해당한다. 이런저런 잣대를 갖다대기 시작하면 바람직한 기준에 합당한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며 대부분 '환자' 내지는 '고위험군'으로 전락한다. 질병도 마찬가지다. 발기부전.탈모증.폐경 증후군 등 질병들이 옛날엔 자연스러운 노화나 체질의 하나로 이해됐다. 그러나 이젠 반드시 극복해야 하며 걸리면 나만 억울한 질병으로 인식된다. 여기엔 제약회사와 의료계, 미디어의 눈에 보이지 않은 부추김도 한몫한다. 약을 많이 팔기 위해 질병의 위험성을 과도하게 부풀리는 경향이 없잖아 있다는 뜻이다.

물론 진단 기준이 까다로워지고 질병에 대한 인식이 확대되는 것은 질병을 일찍 발견해 관리하자는 선의의 의도가 있다. 그러나 한두 가지 기준에 해당된다고 내가 '비정상'이라고 확대 해석해선 곤란하다. 상업주의에서 비롯된 웰빙 열풍은 교묘하게 모든 진단 기준에서 완벽하며 며칠 밤을 새워도 끄떡없는 사람을 이상적 모습으로 세뇌시킨다. 조그만 불편조차 참지 못한다. 하지만 웰빙은 결코 수퍼맨이 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웰빙은 질병과 노화를 포함해 자신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자세에서 비롯된다. 처참하기 짝이 없는 자물쇠 증후군에 빠진 보비조차 웰빙은 가능하지 않았던가.

홍혜걸 의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