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수록 세지는 헌재 … 여야, 정치 쟁점 들고 자꾸 달려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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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이전 반대, 선거구 재조정. 그리고 12월 19일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 헌법재판소가 다시 여의도를 놀라게 했다. 9명의 헌법재판관들이 한 번 결정할 때마다 ‘사상 초유’ ‘헌정 사상 최초’란 수식어가 붙고 있다. 헌법재판소는 1987년 6월 민주화 운동의 산물이다. 원래 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끝난 직후 제2공화국 헌법에 포함됐으나 1년 뒤 5·16 군사정변으로 설립이 무산됐다. 지금의 헌재는 87년 민주화 운동의 성과물이다. 군사정권 시절 누적된 사법부에 대한 불신이 헌재 설립의 원인이다.

 헌재는 위헌법률·헌법소원(기본권 침해 시 헌재에 구제를 청구하는 제도)·권한쟁의(국가기관 또는 지방자치단체 사이에 벌어진 권한 다툼)·탄핵·정당해산 등 5가지 사안을 심판하는 기구다. 헌재는 재개원 이후 친일 재산 몰수를 ‘합헌’이라고 결정했고, 박정희 정부 시절의 대통령 긴급조치 1·2·9호에 ‘위헌’ 결정을 내렸다. 99년엔 군필자 가산점제를 ‘위헌’이라고 결정했다. 2000년대 들어선 정치 현안이 헌재에서 다뤄지기 시작했다. 정치권이 헌재를 끌어들였다. 2004년 5월 당시 한나라당과 새천년민주당이 제기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이 대표적이다. ‘탄핵 역풍’ 속 헌재는 이를 기각했다. 헌재의 기각 결정으로 노 전 대통령은 두 달여 만에 대통령직에 복귀했다. 소추안을 발의했던 한나라당은 ‘탄핵 역풍’으로 정치적 타격을 입었다.

 그해 10월엔 노무현 정부가 헌재발로 타격을 입었다. 정부가 추진했던 행정수도 이전계획이 위헌 판결을 받으면서다. 헌재는 당시 조선의 경국대전을 들어 ‘서울이 수도’라는 관습헌법을 인정했다.

 2008년엔 종합부동산세 위헌 결정이 정치권을 강타했다. 이명박 정부 출범 첫해에 헌재는 “세대별로 합산해 부과하는 종부세를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당시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이 헌재 판결 전 국회에 출석해 “종부세가 위헌으로 갈 것 같다는 보고를 받았다”고 발언했다 논란에 휩싸였다.

 최근엔 “선거구의 최대·최소 인구비율이 2대 1을 넘지 않아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해 정치권에 비상을 걸었다. 선거구 획정에 대한 논의는 매번 헌재가 도맡아 왔다. 2001년엔 3대 1로, 이번엔 2대 1로 가이드라인을 바꿨다.

 헌법재판관 9명은 대통령과 대법원장, 국회가 각각 세 명씩 추천해 대통령이 임명한다. 판사 출신인 새정치민주연합 박범계 의원은 ‘헌재 이니셔티브 국면’이란 표현을 썼다. 그는 “사법부의 판단은 하급심으로부터 3심의 검증 과정을 거치지만, 헌재는 9명의 재판관이 한 번에 판결을 내린다”며 “특히 정치적 쟁점에 대해 선도적 결정을 내리는 일이 반복되면서 영향력이 갈수록 커졌다”고 말했다. 국회 법사위원들 가운데는 “헌재의 힘이 대법원보다 센 것 같다”고 말하는 의원도 있다.

 법조계 일각에선 헌법재판관 구성의 다양성에 대한 요구도 나오고 있다. 헌재 결정이 정권의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경희대 정태호(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헌재의 역할은 필요하지만 소수파의 기본권을 지킬 수 있는 저지선도 있어야 한다”며 “상·하원이 절반씩 추천하고 의회의 3분의 2가 찬성을 얻어 헌법재판관을 임명하는 독일의 사례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강태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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