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세민에 주던 밀가루도 이젠 끊어졌죠"|쓸쓸한 연말 보내는 마지막 궁인 성옥염 상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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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삶이란 고독하고 의로운 것임에는 틀림없다. 그러길래 일찍이 「야콥센」은 『사람은 홀로 태어나 혼자 살아가다 홀로 쓸쓸히 죽어간다』고 했는지도 모른다. 세밑에도 불우한 삶이 어디 한두 사람일까 마는 여기 황혼의 삶을 바라보며 홀로 쓸쓸히 살아가는 한 궁인이 있다. 성옥염 상궁 (63)-.
그는 시대와 시대의 교차기에서 소리없이 희생된 역사의 순교자이기에 그의 생활에 얼룩진 아픔들은 더욱 보는 이의 가슴을 저리게 한다.
서울 성북구 보문동 보문사 부설 시자원 302호실. 방 한칸과 마루·부엌이 전부인 6평도 채 못되는 이 집이 그가 의지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보금자리다.
『7년전 윤비 마마 3년상을 마치고 낙선재에서 나와 이곳에 왔지요. 아무리 세상이 열두번 바뀌었다해도 궁인의 도리로서 왕비 마마 영구차가 나온 다홍삼문으로 우리네 영구차가 나올 수는 없는 일 아니겠어요? 그래서 그 곳을 떠났지요』
김 상궁·박 상궁과 함께 낙선재를 뒤로하고 무작정 나온 그는 그동안 고락을 같이하며 형제처럼 지내오던 박 상궁과 시자원을 찾아들었다.
그들이 지닌 것이라고는 낙선재를 떠나올 때 각자가 받은 돈 1백만원과 허름한 찬장 하나가 전부. 그래서 궁에서 상궁들이 이사온다는 소문을 듣고 세간살이 구경을 나왔던 사람들이 크게 실망,『겨우 이것이냐』고 몇 번씩 되묻는 진풍경이 벌어질 정도였다.
시자원 입실비와 생활비·약값으로 낙선재에서 받은 돈은 오래지 않아 동이 나버렸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세칭 「사발 농사」. 말이 좋아 농사지, 이집 저집 아는 집들을 찾아다니며 끼니를 때우는 그런 생활이다.
성 상궁에게도 좋았던 시절이 있었다. 부족한 것을 모르고 지내던 어린 시절, 말로만 듣던 궁에서 긴 옷자락을 끌며 살아가던 일들은 아직도 생생한 기억으로 그의 가슴에 남아 있다.
그가 궁과 인연을 맺게된 것은 그의 나이 15살 때. 재동학교 이사로 지낸 성수영씨의 6남매 중 둘째딸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음전하고 말수가 적으며 특히 바느질 솜씨가 뛰어났다.
하루는 운니동 집에 궁에서 항아님이 한분 나오셨다. 그분은 자신이 이제 늙어 눈이 어두어져 바느질을 하기가 어려우니 옥염을 궁에 데리고 갔으면 한다는 의견을 표시했다.
이렇게 시작된 그의 궁녀 생활은 아무런 어려움 없이 지낼수 있었다.
『해방이 되자 일본인이 3개월분 월급을 주고 갔어요. 아마 그것이 당시로는 쌀 7가마 값 정도는 됐을 거예요.
그러나 막상 3개월이 지나니 나온다면 월급은 쌀 1말 값도 안나오는 데다 궁 안의 생활도 어렵고 자리도 안 잡혀 고생이 많았지요』
그래서 이때 동료 중에 상당수가 궁을 나와 결혼하여 여염집 부녀자로 변신했다고 성 상궁은 들려준다.
해방 직후부터 성 상궁의 고생은 시작됐다.
처음에는 빈궁에 있으면서 남은 궁녀끼리 자신들의 월급으로 밥을 지어먹곤 했으나 얼마안가 월급이 떨어지고 궁에서도 이들을 보살필 수가 없게 되자 뿔뿔이 내보내게 됐다.
『저보고는 한 양약방에 가서 있으라고 하더군요. 그곳에서 며칠 지내는데 그저 눈물 밖에 안나와요. 약방 주인께 통사정을 했더니 쌀 2말 값을 주시더군요. 그래서 그것을 가지고 다시 궁으로 들어갔지요』
그러나 고생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6·25라는 민족상쟁의 포화는 몰락해 가는 왕실에 다시금 철퇴를 내리쳤다.
탁발로 끼니를 이어가는데 그나마 무우나 비지가 고작이었다. 동네에서 갖다준 된장국 한그릇을 찬방 노인이 실수로 엎질러 안타까와한 일, 길가에 널린 묵은 김치를 한 조끼라도 얻어가기 의해 주위를 맴돌다 끝내 빈손으로 돌아온 일 등은 어두웠던 시절의 아픔으로 남아있다.
『피난 중 4∼5번 이사를 했지요. 처음엔 안방을 내어주던 사람들이 좀 시간이 지나면 건넌방으로 옮기라고 성화를 댑니다. 고생은 했지만 끝내 윤비께서 낙선재에 들어가 승하하셨으니 궁녀 생활에 여한은 없어요』
『세상이 너무 메말라 있음을 자주 느껴요. 얼마 전까지는 영세민이라고 해서 한달이면 밀가루 1부대와 연탄 값 3천원씩을 주곤 했는데 지금은 그나마 안 나와요. 음식은 얻어먹고 하지만 한달을 살려면 10만원은 있어야하는데 그게 그리 쉽나요.』
그는 얼마전 작고한 박 상궁이『생활 대책이 서는걸 보지 못하고 혼자 남겨두게 돼 마음이 아프다』고 유언했다고 전하면서 잠시 눈시울을 붉힌다.
박 상궁의 별세로 철저하게 혼자 남은 그는 불교에 의지, 아침마다 금강경을 읽으며 고독을 달랜다.
혈압이 높고 신경통이 심해 진통제 없이는 지내기 어려울 정도로 곤란을 겪고있는데 돈이 없어 병원은 문턱에도 못 갈 처지다.
기울어 가는 왕실에 궁녀로 들어가 영화보다는 고초로 젊음을 모두 바쳐버린 성 상궁. 그러나 그는 『다시 태어나도 궁녀로 살고 싶다』며 끝까지 궁인으로서의 자부심을 버리지 않는다.
그의 가난한 생활은 고독에 절어버린 삶과 합께 저물어 가는 세밑을 더욱 쓸쓸하게 한다. <홍은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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