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존공영 내걸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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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보기

종합 09면

이상과 같은 통치수범의 교묘함과 아울러, 문화통치는 기만정치의 대명사라고 할 정도로 기만성이 또한 큰 특색이다. 이것은 문화정치가 갖는 2중구조적성격에서 우러나오는 필연적인 산물이지만 정치선전에서 더욱 현저하게 나타난바 있었다. 정치선전에 관해서는 지면의 관계로 길게 다룰수 없지만 그 후유증이 가장 큰 것으로는 1920년대중기에서 1930년대에 걸쳐서 장기적으로 발간된 수십집에 달하는 『조선총독부조사자료』를 들수있다. 이 「조사자료」는 한국의정치·경제·사회·문화의 각방면에 걸쳐 인구·상업·시장·토지·종교·풍속습관·언론등 통치상의 필요에서 나온 특이한 제목을 가지고 있는데 그중에는 공간되지 않고 통치권력내분에서만 볼수 있었던 비밀문서도 많다.
그 편집목적이 식민지 지배의 유지에 있었기 때문에 내용에는 편견과 고의적인 왜곡과 허위가 많다. 그러므로 그런 자료를 이용할 경우에는 철저한 사료비판이 필요함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다음에는 「문화통치」가 갖는 민족분열 정책으로서의 성격을 살펴보기로 하자. 무릇 외래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지 통치에 있어서 피압박민족의 강력한 해방투쟁에 의하여 식민지지배가 위기에, 직면할 적에는 피압박민족의 내부분열을 꾀하는 분할통치를 보다 더 강화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바 없다. 일제의 한국통치기간중 짧은 기간이나마 이 정책을 채택한 때가 바로 이 「문화통치」의 시기였다. 3·1운동후 총독 재등실이 내건 여러 정책도 자세히 분석해보면 거의가 이런 목적에서 나온 것임을 알수 있다.
그런데 3·l운동후에 나온 일제의 분할통치가 구미제국주의 열강의 그것과 다른 특징의 하나는, 한국이 남쪽의 열대지방의 「복합사회」처럼 종족·종교·문화적 전통이 서로 다른 복잡다양한 대립요소가 없기 때문에 주로 계급분단에 의한 분할통치를 실시했다는 점이다.
그것은 우리 민족이 민족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역사적 전통에 있어 단일한 민족이므로 민족의 내부분열의 방법을 취할 수 밖에 없었다고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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