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포위해 위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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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그중에도 외교권의 탈취는 국권말살에 특히 중요한 것이므로 서둘러서 침략군의 위력을 빌고 「스티븐즈」를 앞세워 노일전쟁 종결 전에 이어 일제측이 완전히 차지했던 것이다. 즉 전쟁중에 미·영·독·불을 비롯한 모든 한국의 해외공관이 폐쇄되고 그 업무를 당지에 있던 일제공관에서 대행케 하였다.
또한 서울에 주재한 각국 외교공관도 실질상 그 기능을 잃게 만들었다. 때문에 영국대리공사 이한응이 을사오조약이 체결되기 6개월전인 1905년5월에 외교권이 없는 것은 「국무주권」이라 생각하여 공관폐쇄와 귀국명령을 반대하고 순국자결을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조약의 명목으로 합리화시킨 것이 바로 을사오조약이란 것이다.
이러한 을사오조약이 체결되었든 아니 되었든 한국의 외교권은 이미 상실된 것이었지만 마치 일제는 한국과의 협상에 의하여 외교권을 양도받은 것같이 왜곡시킨 것이다. 게다가 을사오조약 체결시 한국정부는 동의할 의사도 없었고 또한 합법적으로 절차도 밟지않았다. 뿐만 아니라 고종은그 조약의 효력이 발생할 인준을 거부했던 것이다.
그러나 일제는 그들 침략군으로 궁궐을 포위, 총검으로 강제로 대신회의를 열게하고 한국침략의 원흉인 이등박문이 직접 회의를 주재하여 을사오적만의 찬동으로 이 조약이 체결된 것이라고 국내외에 선전시켰던 것이다.
때문에 전국에서는 의병의 항일전이 보다 격화되었고 애국계몽운동을 통한 국권수호항쟁이 5∼6년을 두고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것이다. 또한 고종은 을사조약이 무효라고 주장하면서 「헐버트」박사나 이상설·이준등의 밀사를 해외에 파견하여 구국외교를 벌이다가 마침내 1907년7월 야반에 침략군의 총검하에 강제 퇴위를 당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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