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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양국학계, 무엇을 어떻게 보나|운양호사건은「정한 론」의 연장|개항|동덕모<서울대 교수·동양외교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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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1876년 2월 강화도에서 한국은 일본의 요구에 응하여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최초로 그 문호를 외국에 개방하게 되었다. 그리고 1년 후에는 미국이란 서양 국과도 수호통상조약을 맺었다.
강화조약이전 한국은 국내적으로 큰 변화와 시련을 겪고 있었다. 소위 세도정치와 삼정의 문란으로 부패가 심했고, 양반신분체제는 산업의 발달과 상인과 부농의 대두로 붕괴되기 시작했고, 민란이 빈번했으며 동학이 발생하고 천주교가 전파되고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대원군은 l864년 그의 어린 아들 고종이 왕위에 오르자 집권하게 되었다.
집권한 대원군은 곧 국내적으로 일대 개혁을 단행했다. 파벌을 일소하기 위해 안동 김씨 세력을 제거하고 공평한 인사행정을 실시하고 지방과 계급의 차별을 타파하고 면세와 면역의 특권을 누리면서 경제적 및 정치적 세력을 행사하던 많은 서원을 철폐하고 양반들도 세금을 내게 하는 등 파벌을 없애고 관기를 숙 정했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 불타 버린 경복궁을 많은 세금과 노역으로 재건했다. 그래서 그의 개혁과 경복궁의 재건은 많은 사람들의 불평불만을 사게 하고많은 정적을 만들기도 했다.

<척왜 정책 일관>
대외적으로 대원군은 불교신자로서 천주교를 반대 탄압하고 서양제국의 통상과 개국요구를 거절했다. 그리고 불·미 등의 원정에 대항하면서 끝까지 쇄국정책을 고수했다.
그의 쇄국과 반 기독교정책은 왕권·국권 그리고 전통문화와 질서를 유지·보호하는데 있었다. 그는 서양제국은 침략국이며 천주교는 국교인 유교에 배치되는 것으로 보고개국은 바로 침략과 기존질서의 문란을 초래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특히 서양제국의 아시아진출과 중국의 개국, 그리고 그 후에 있었던 중국에서의 침략을 그는 주시하고 경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중국과의 관계는 조공 또는 사대관계로 일관했다. 그리고 일본과는 교린 정책을 유지했으나 일본측의 대한정책 변경으로 척왜 정책을 쓰게 됐다. 일본측의 대한정책변화는 1868년에 있었던 소위 명치유신을 말한다. 일본은 명치유신을 계기로 무사정부인 덕천 막부를 대신하여 천황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중앙집권화 된 정부를 수립했다.
이 명치유신으로 일본은 새로운 정치기구와 새로운 지도자를 갖게 됐으며, 새로운 토지제도와 관료제도가 이루어졌다. 명치정부는 수도를 동경으로 옮기고, 지사를 임명하여 지방 (현)의 행정을 맡게 하고, 새로운 교육제도를 마련하고 제국군대를 창설하는 등 경치·경제·군사·교육면에서 일대개혁, 즉 근대화 또는 서양화를 과감하게 추진해 갔다.
근대화와 더불어 명치유신후의 일본은 일본식 민족주의도 추진시켰다. 존왕양이로부터 부국강병·애국·충성·봉사·의무·불평등조약개정 등을 강조하면서 국력배양, 서양 열국 과의 평등과 해외진출도 추구했다. 근대화에 성공하고 있던 일본은 이제 서양제국과 체결한 불평등조약의 개 정을 위한 준비작업으로 암창구시를 단장으로 하는 시찰단을 구미제국에 파견하기도 했다(l871-1873). 그리고 중국과는 l871년에 대동하고 평등한 입장과 내용의 조약을 체결했다.

<외교관계 변경요구>
이와 같은 일본의 근대화·서양화는 서양의 제국주의도 모방하여 명치정부는 팽창주의를 그 외교정책으로 삼고 대륙진출을 추진하게 되니 그 최초의 침략대상지가 한반도가 되었다. 그리하여 일본은 명치유신(왕정복고)을 한국 측에 통고하고, 한국과의 기존외교관계(제도·형식)를 일방적으로 변경하고 새로운 일본식(서양식)관계를 요구해 왔다.
이와 같은 일방적이고 새로운 일본측 요구를 대원군이 거부하자, 한일교섭대표로 내한했던 좌전소일낭은 귀국하여 정한의 건 백서를 본국정부에 제출했다(1871). 이 건 백서에서 좌전은 한국에서 문신들은 일본과의 수호를 바라고 있으나 무신들이 반대하고 있다 하고 일본이 무력으로 조선을 정보 할 것을 제의했다. 일본 내에는 이제 정한 론이 대두되었으며 일본정부는 미국「페리」(Perry)제독의 방법을 따서 군함을 파 한하여 한국과의 수호를 시도했다.
그러나 대원군은 더욱 일본에 대해 강경책을 썼으며, 일본 내에는 정한 론이 격화되었다. 그러면 정한논의 배경과 성격은 어떤 것인가.
1854년 미국에 최초로 개국한 일본은 근대화·서양화·산업화와 더불어 시장과 자원을 추구하면서 부국강병 책을 썼다. 이러한 정책은 일본의 팽창주의와 제국주의를 가져왔다.「일본은 한국에서 침략적이고 군사적인 계획을 채택했다.」이와 같은 신 일본의 새로운 대한정책에 한국 측이 불응하자 정한 론이 대두된 것이다.
그때 중국은 이미 서양제국에 개방되고 그들의 침략을 받고 있었다. 안으로는 태평천국의 난으로 쇠퇴해 가고 있었다. 그러므로 중국은 일본의 한국개국을 반대할 입장이 못되었다. 한편 한국은 이미 쇠퇴해 가고 있던 조선을 개혁과 쇄국으로 유지·보호하려던 대원군과 그의 정적인 민비와 유림 파의 대립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이러한 중국의 약점과 한국의 분열은 일본의 한반도 침략을 유리하게 했다.
일본은 한국 측에 우선 명치유신을 통고하고 일본식 방식과 제도로 수교를 교섭했다. 대원군이 이같은 요구를 거절하자 일본은 화방 의질과 군함을 한국에 파견했다. 그러나 한국 측의 반대로 교섭이 실패하자 격분한 서향강성 같은 강경 론자는 더욱 정한 론을 주장했다.
정한 론은 일본의 대한교섭실패로 시작되었고 명치정부의 팽창주의, 불평 가진 무사들의 배출구로서 서향강성의 그릇된 애국심 및 개인적 야망, 그리고 반 서양감정을 다른 데로 돌리기 위한 복합적인 요소들이었으나 명치일본의 팽창주의·제국주의·침략주의 등 이 그 근본성격이었다.
그리고 정한 론에는 전통적인 무사계급이 지배한 일본의 군국주의와 천황을 신격화한 일본민족의 우수성을 강조하는 종교적·민족주의적 요소도 포함되고 있었다.
이와 같은 국내적 배경에서 새로운 제국 일본은 부국강병을 목표로 하고 서양문명과 제국주의를 받아들여 1등 국이 되기 위해 노력하면서 후진국인 아시아제국에 대해 침략정책을 썼다. 그리고 국내적 단결과 자원의 획득을 위해 해외진출을 일본은 바랐으며, 당시 일본의상이었던 부도종신은 『만일 우리가 일본의 독립을 보존하려면 대륙에 영토를 보유해야 한다.

<강화도서 수교조약>
일본이 빼앗을 나라는 대륙에는 오로지 중국과 조선 두 나라 뿐이다. 전쟁으로 일본을 강화시키는 것은 국가와 천황에게 충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지도원칙이 되어야 한다』라고 했다. 그리고 한국과의 전쟁을 위해 서향은 자신이 한국에 파견, 살해되어 개 전의 구실을 만들 것을 청하기까지 했다. 이제 일본정부는 정한 실행단계에 도달했다.
그러나 1873년 한·일 양국에는 큰 정치적 변화가 일어났다. 한국에서는 민비 파와 최익현 등 유림 파가 규합하여 국왕의 지지찬성으로 대원군을 권좌에서 축출했다. 같은 해(1873)일본에서는 서양제국의 시찰에서 귀국한 암창구시 등 문치 파가 무사파인 서향의 강경파를 천황의 지지로 패배시켰다.
권력투쟁에서 승리한 암창파(온건파)는 국내적 발전·국제적 정세 그리고 재정적 약점 등을 들면서 정한 론을 반대했다. 그러나 온건파인 암창파가 대륙진출이나 한반도침략 자체를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서향의 무사·강평파와 같은 목적을 갖고 있었으나 방법과 시기 그리고 주도권 때문에 의견을 달리했을 뿐이다. 그래서 정한 론을 반대했던 온건파의 일본정부는 다음해(1874)대만에 원정을 보냈으며, 그 다음해(1875)에는 군함을 한국에 파견했는데 이는「변형의 정한 론」이었다.
즉 일본은 군사력으로 위협하여 유리한 조건하에서 조선문제를 해결하기로 했다. 그 해결책으로 군함을 한국에 파견하여 소위 운양호사건을 일으켰다. 한편 한국에서는 쇄국정책의 상징이었던 대원군을 대신하여 집권한 민비 파가 쇄국의 반대인 개국정책을 쓰고 있었다.
이와 같이하여 운양호사건을 계기로 한일간에는 교섭이 이뤄져서, 결국 1876년 2월26일 한일양국은 강화도에서 수호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이 강화조약에서 일본은 한국에 진출하기 위하여 우선 한국과 조공관계를 갖고 있던 중국의 세력을 약화 또는 축출하기 위하여, 조약 제1조에서 한국의 자주독립을 강조했다.
그리고 부산을 개항하고 2개의 항구(후에 원산과 인천)를 개방하게 하고 6개월 후에 통상에 관한 조약을 체결토록 했다.
동년8월에 체결된 조약에서 일본은 한국에서 일본화폐사용권과 일본정부에 속하는 선박의 관세면제까지 받는 서양제국 이상의 불평등하고 침략적인 조약을 체결했다. 한국은 정치적으로 외교관계, 경제적으로 교역, 즉 일본의 시장 화, 그리고 문화적으로 일본 및 서양의 문물을 자의 및 타의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제 동북아의 유일한 쇄국국가였던 조선도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의 개국은 중·일 양국과 같이 서양국가에 의해 이루진 것이 아니고 같은 동양 국인 일본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 개국을 시작으로 일본은 한국을 침략하기 시작하여 임오군란·갑신정변·청일전쟁·노일전쟁 등을 거쳐 한국의 주권을 빼앗고 l910년에는 한국을 완전히 일본제국에 합방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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