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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정부 도청'발표, 의문만 더 키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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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김승규 국정원장은 그제 국회 정보위에서 김대중(DJ) 정부 시절에도 불법 감청이 이뤄졌던 흔적이 드러났다고 거듭 밝혔다. 그는 그러나 "과거와 달리 무차별적으로 행해지지 않았다는 측면에서 차별성도 분명히 확인됐다"고 강조했다.

국정원 측은 그동안 DJ 정부 때의 도청 대상엔 정치인이 포함되지 않았다고 설명해 왔다. 그러다 "당시 휴대전화 감청장비를 사용한 직원들도 대공수사나 안보목적과는 관계없이 일부 임의로 불법 감청을 한 사실을 부정하지 않고 있다"고 물러섰다. 그렇다면 대공 용의자 전화번호에 정치인이나 사회 지도층, 언론인 등의 전화번호를 끼워넣어 얼마든지 불법 도청을 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그런데도 이를 과거와 달라진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으니 궁색하다.

이동식 휴대전화 감청장비(CAS)의 사용 기간이 바뀐 것도 국정원 조사가 허술했다는 증거다. 당초 발표 때는 1999년 12월부터 2000년 9월까지라고 했다가 20일 만에 2001년 4월까지로 번복했다. 실무자들이 작성한 장비지원 신청서 등을 통해 추가로 드러났다는 것이다. 결국 사실관계조차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채 서둘러 발표했다는 말이 아닌가.

혹시라도 국정원이 김 전 대통령 측의 반발을 무마하려고 실상을 은폐 또는 축소하려 한다면 국민을 두 번 속이는 처사다. 김 원장은 지난 5일의 대국민 사과 성명에서 "이제부터 백지에 국가정보원의 역사를 새롭게 쓴다는 비장한 각오로 다시 시작하려고 한다"고 다짐했다. 국정원이 진정 거듭나려면 과거의 잘못을 한 점 숨김없이 밝혀야 한다. 불법 도청이 드러난 이상 DJ 정부 시절의 국정원장들도 반발만 할 게 아니라 솔직하게 진실을 고백해야 옳다. 그것이 공직에 몸담았던 사람으로서 책임지는 자세다.

진실규명을 위해 국정원은 검찰 수사에 적극 협조해야 한다. 검찰은 불법 도청이 누구의 지시에 의해 누구를 대상으로 이뤄져 어느 선까지 보고됐으며, 이를 어떻게 활용했는지 철저히 규명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