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와 자동차] 영친왕비 이방자 여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10면

일제 통감부의 초대 통감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강제로 고종의 셋째 아들 영친왕과 정략 결혼한 일본 황족 출신의 공주 이방자(1901~1989년)여사.

李여사는 손수 운전은 안 했지만 비원에 보존돼 있는 고종의 어차(御車)를 비롯해 일본.유럽.국내 등지에서 생활하며 수많은 자동차를 탔던 주인공이다.

李여사가 자동차를 처음 탄 것은 13세 때인 1914년 일본 황실에서였다. 1920년 영친왕과 결혼한 李여사는 22년 순종에게 인사하기 위해 처음으로 한국에 왔을 때 순종이 내준 어차에 탑승했다. 이 차는 지금까지 비원 어차고에 보존돼 있는데 차종은 영국제 다임러 리무진이었다.

이렇게 시작한 李여사의 서울 나들이는 63년 완전 귀국할 때까지 네번에 그쳤다. 그러나 그 때마다 기차.마차.자동차.가마 등 구식과 신식 운행수단을 번갈아 탔다.

李여사는 생전 가장 인상 깊었던 차로 동구릉 선대왕 성묘 길에 탔던 순종의 캐딜락 리무진을 꼽았다. 이 캐딜락도 역시 비원 어차고에 보존돼 있다. 李여사는 지금까지 한국에 현존하는 어차 두 대를 모두 타본 셈이다.

27년 李여사는 영친왕과 처음으로 떠난 유럽 여행에서 국빈 대접을 받았다. 특히 나라마다 제공받은 수많은 명차를 타보며 영욕으로 점철된 일생 중에 유일하게나마 행복했던 시절을 보낸 것이다. 벤츠 리무진을 좋아했던 영친왕은 일본으로 돌아오자마자 파란색 벤츠를 구입했다.

70년 영친왕이 세상을 떠나자 李여사는 남은 생을 한국을 위해 바치기로 결심하고 사회복지활동에 나섰다. 李여사는 문화재관리국에서 내준 일제 크라운을 시작으로 포니.마크Ⅴ.레코드 로얄 등을 바꿔 타면서 복지사업에 마지막 열정을 쏟았다.

李여사는 생전에 차를 탈 때마다 정좌(正坐)자세를 일관했다. 사회활동을 하면서 하루 평균 세시간 이상 차 속에서 지냈지만 방석을 등에 대고 반듯한 자세로 앉은 채 옆을 내다보거나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차가 조금만 느리게 달려도 뒤에서 클랙슨을 마구 누르는 사람들의 각박한 운전 매너를 가끔씩 질타했다고 한다.

전영선 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