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가 있는 아침 ] - '노숙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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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노숙일기' 전기철(1955~ )

가난한 밤은 길다

수녀들이 지나가고

신부들이 지나가고

골판지 박스가 오고

신문지들이 오고

밤은 천천히 걷는다

소주병들이 여기저기 흩어지며

욕설을 폭죽처럼 터뜨린다

차곡차곡 쌓인 하루 위에 몸을 눕히면

잠 속으로 발자국이 찍히고

아직 밥을 먹지 못한 영혼이 휘파람 소리를 키운다

밤은 저 홀로 깊어가고

잠들지 못한 이들의 신발은

발레를 하듯 절뚝인다


한밤중 서울역이나 영등포역 혹은 청량리역에 나가 보면 가난한 밤을 만날 수 있다. 길고 긴 가난한 밤 속으로 수녀들과 신부들이 지나가지만 그들(노숙자들)의 영혼은 구원받지 못한다. 폭죽처럼 터지는 욕설과 여기저기 널브러진 소주병들…. 저 빈 병들은 가공할 흉기가 될 수 있고 재활용으로 요긴하게 쓰일 수도 있다. 노숙자들이야말로 누군가 마시고 버린 빈 병들이 아닌가.

이재무<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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