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 사상 첫 압수수색] 침통·분노·자괴 … 흉흉한 국정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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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통과 분노, 그리고 한없는 자괴감… 한마디로 흉흉하다."

창설 이래 처음으로 본부 건물을 압수수색당한 19일 국정원의 한 중견 간부는 원내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국정원 직원은 전국을 통틀어 모두 ○○○○명 규모. 압수수색은 본부 내 일부 장소에 한정됐지만, 직원들이 받은 심리적 충격은 조직 전체를 강타한 듯했다. 30대 후반의 9년차 직원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국가를 위해 일한다는 자부심이 송두리째 날아가버렸다"고 말했다. 국정원이 최고 정보기관에서 범죄를 저지른 수사 대상으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다른 간부는 "자업자득의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과거 국정원이 불법적인 수사기법을 사용해 왔던 것이 사실"이라며 "이번 사건을 시대변화에 맞춰 국정원이 '비제도권'에서 '제도권'으로 나아가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상당수 국정원 직원들은 불법 도청 사실을 스스로 고백한 이상 검찰 수사에 협조해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불법 도청 수사와 관련된 최근의 정치권 흐름에는 강한 불만을 숨기지 않았다. "과거 정권 및 국정원의 수뇌부는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국정원 말단 직원들이 불법 도청을 주도한 것처럼 몰아가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 관계자는 "전직 국정원장 등이 부하들에게 책임을 돌리는 모습을 보고 배신감을 느끼는 직원이 많다"며 "그들은 '다 내 책임이다'고 하는 모습을 보였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들은 국정원 직원들에 대한 사법처리가 시작될 경우 조직 동요는 더욱 커질 것으로 예상했다. 국정원은 또 검찰 수사가 장기화되면서 국가 정보 역량이 노출되고, 조직 기강이 무너질 가능성을 염려하는 분위기다.

한 간부는 "비밀유지 의무를 목숨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정보기관의 기강이 한번 무너지면 쉽게 회복되기 어렵다"며 "지금 원내 분위기는 우려할 만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사회 곳곳에서 국정원 해체 등 개혁을 외치지만 경찰 조직 등과 비교할 때 더 줄일 사람도 없다"고 했다.

김정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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