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와 합류바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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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죽산이 이대통령의 반대진영을 이루면서 그가 찾았던 최초의 정당모색은 보수세력과의 합류였다.
54년 자유당은 이대통령의 3선의 길을 열기 위해 사사오입이라는 숫자풀이로 3선개헌안의 가결을 선포했다. 그러자 야당정파는 호혜동지회로 결속해 자유당에 대결했다.
민국당, 무소속동지회등 국회안의 반정부 세력이었다. 호헌동지회는 신당운동으로 발전해 신당추진준비위원회를 구성했다. 신당은 반독재민주세력의 규합을 창당지표로 했다. ①뚜렷한 공산주의자 ②독재정권에 깊이 가담한 세력의 두 그룹만을배제한 재야세력 규합운동이었다.
배제하는 대상중 ①은 어떤 대상이 있었다기 보다 반공의지의 표시였다. ②는 부산정치파동 때 야당탄압에 앞장 섰던 이범석씨의 족청세력을 가리킨 말. 그무렵 족청온 자유당에서 제거돼 야의 진영에 있었지만 신당추진 그룹은 이들과는 손잡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었다.
이런 원칙이 정해지자 신당운동의 구심점이기도 했던 신익희씨가 이운동을「민주대동」이라고 명명했다. 민주세력은 과거의 정파를 초월해 대동단결한다는 창당원칙의 선언이었다.
이랬을때 구체적으로 떠오른 그룹은 3개정파. 제l세력은 신익희·조병옥으로 대표되던 민국당계, 제2세력은 장면으로 대표되던 원내자유당파와 흥사단계 그리고 제3세력은 조봉암계열이었다.
장면씨가 어떻게 원내자유당계를 대표했을까. 이에대한 신도성씨의 회고. 『52년 부산 정치파동으로 거슬러가게 된다. 나는 부통령 비서실에 있었던 연고로 야당운동에 참여해있었다. 당시 이대통령은 국제공산당 자금이 들어와 대한민국을 파괴하려 한다는 담화를 낸 일이 있다. 물론 국제공산당자금이 들어온 것은 아니지만 해외에서 정치자금이 들어왔다는 얘기는 일반화되어 있었다.
당시 헌법은 대통령은 국회가 선출하도록 되어있었다. 그런데 이대통령이 제안한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은 국회에서 극소수의 찬성에 그쳐 부결됐다. 대통령의 국회내 기반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 확인된셈이었다. 이럴 때 총리였던 장면씨가 원내자유당의 보스로 등장했다. 그는 평양출신의 실업인들, 그리고 해외유력자의 자금후원을 얻어 국회의원 포섭활동을 벌였다.
마침 리더가 없었던 원내자유당파와 별다른 조직기반이 없던 장면씨간에 이익이 일치돼 합류는 손쉽게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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