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폴란드의 선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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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우리가 폴란드를 읽는 창은 비교적 간단하다. 보통 교과서나 위인전 속의 퀴리 부인을 통해 폴란드를 처음 만난다. 청소년기에 폴란드를 만나는 창은 쇼팽이다. 이 무렵 읽는 김광균 시인의 '추일서정(秋日抒情)'은 폴란드에 대한 이미지를 어느 정도 굳힌다.

'낙엽은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포화(砲火)에 이지러진/도룬 시의 가을 하늘을 생각케 한다/…'

이 시가 주는 황량하고 쓸쓸한 분위기는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의 삼색(三色)영화, 특히 '화이트'에 그대로 이어진다. 물론 바웬사와 교황 요한 바오로2세를 통해 폴란드의 또 다른 면을 보기도 한다.

폴란드는 여러 모로 우리와 비슷하다. 특히 강대국들 틈에서 고생한 역사가 그렇다. 우리가 중국과 일본에 시달릴 때 폴란드는 러시아.독일.오스트리아에 철저하게 유린됐다. 일제의 한반도 강점이 36년이지만 폴란드는 1775년부터 1백23년간 이들 3개국에 분할 점령됐다.

20세기 들어서도 마찬가지다. 1939년 나치독일이 폴란드를 전격 침공하자 소련도 폴란드 동부를 점령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국토가 서쪽으로 이동하는 희한한 일도 생겼다.

동쪽 땅을 소련에 내준 대신 서쪽 독일 땅을 차지한 것이다. 이 때문에 독일이나 러시아에 대한 폴란드인들의 반감은 원초적이다. 우리가 일본에 갖는 감정과 비슷하다.

그러면 폴란드는 요즘 유행어로 우리와 코드가 맞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폴란드는 최근 우리와 코드가 다른 선택을 했다. 우리나라에서 반미감정이 점점 높아지는 것과 달리 폴란드는 작심하고 친미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얼마 전 폴란드가 미국.영국과 함께 당당히 이라크 평화유지군의 주역으로 발표되자 전세계가 놀랐다. 그러나 저간의 사정을 살펴보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지난해 말 미국의 F-16 전투기 48대를 구매키로 한 폴란드는 유럽이 친미-반미로 갈리자 미국 편에 섰다. 이번 전쟁에 2백명의 전투병을 보냈고, 미군기지 유치에도 적극적이다.

그래서 유럽 좌파들로부터 호가호위니, 용병이니 하는 비판도 듣는다. 그러나 폴란드라고 왜 자존심이 없겠는가. 외세에 반대하고 자주독립을 중시하는 것이 결코 우리에 뒤지지 않는다. 바로 그 때문에, 즉 실패한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그중 믿을 만한 미국을 이용(用美)하려는 것이다.

곧 미국을 방문할 노무현 대통령은 이런 폴란드의 선택이 던지는 의미를 잘 음미해 보시라.

유재식 베를린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