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여자골프 '충청도의 힘' 뭔가 있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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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김주연(KTF) US여자오픈 우승(6월), 장정 브리티시오픈 우승(8월). 올 시즌 4대 여자골프 메이저 대회 중 2개 대회를 충청도 출신 골퍼들이 휩쓸자 '충청도의 힘'에 관심이 쏠린다. 이들 앞에는 박세리(CJ)가 있다. 충청도 출신 여자 골퍼는 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KLPGA)에 등록돼 있는 395명의 프로선수 중 10명도 되지 않는다. 박세리.김주연.장정 외에 LPGA 투어의 문수영, 일본 투어의 이은혜, 국내 투어의 홍진주 정도다. 올해 LPGA 투어 캐나다 오픈에서 우승한 이미나는 전주 출신이지만 고등학교를 청주(상당여고)에서 다녔다. 숫자는 적어도 이들의 활약은 눈부시다. 충청도 우먼 골프, 그 괴력의 원천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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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프는 템포가 중요하다. 말씨와 걸음걸이가 느린 충청도 사람들이 다른 지역 사람들보다 골프를 잘 칠 수밖에 없다."

장정을 길러낸 유성여고 문종성 체육부장은 "충청도 사람들의 느긋한 성격이 좋은 성적의 원동력"이라고 말한다. 충청도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 느긋한 것은 아니지만 기질을 무시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유성골프장 이도영 기획조정실장도 비슷한 말을 한다. "성격이 급한 사람치고 골프 잘 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골프장에선 일부러 느리게 걸으라고 권장하기도 한다. 빠르면 몸에 힘이 들어가고, 미스 샷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장정의 아버지 장석중씨도 거든다. "'충청도 양반'이란 말은 나를 내세우지 않고, 서두르지 않는 충청도 기질을 나타낸 것이다. 서두르지 말고, 어깨에 힘을 빼고…, 이런 것들이 바로 골프의 제1 덕목 아닌가요?"

# 이들의 뒤에는 유성골프장이 있다. 유성골프장 강민구 명예회장은 골프 꿈나무들에게 무한한 지원을 했다. 마지막 팀이 티업한 오후 4시 이후엔 대전시 골프협회에 등록된 선수들에게 골프장을 개방했다. 300m짜리 연습장은 언제든지 무료로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수도권 소재 골프장으로선 상상하기 어려운 지원이다.

박세리.김주연.장정은 이 골프장에서 살다시피 했다. 장정의 집에서 골프장까지는 차로 10분 거리. 장정이 아니카 소렌스탐과의 맞대결에서 밀리지 않은 것은 골프장에서의 실전 경험이 크게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박세리는 유성골프장 아웃코스 1번 홀 옆에 세워진 기념비에 "세계 정상을 꿈꾸며 골프채를 잡던 나에게 유성골프장은 언제나 포근한 어머니의 품 같았다"는 문구를 새겨놓았다. 요즘은 떼제베.실크리버 등 인근 골프장들도 학생 골퍼들에게 실비로 이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 충청지역 인사들은 "박세리의 영향을 빼놓을 수 없다"고 입을 모았다. 1998년 맥도널드 LPGA챔피언십에서 박세리가 우승한 뒤 지역사회에 골프 붐이 일었다는 것이다. '박세리 효과'다. 장정은 박세리의 이웃사촌이었고, 김주연은 박세리가 기량을 갈고 닦았던 유성CC를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다.

# "박세리.김주연.장정을 보라. 모두 아버지들이 직접 나서서 가르쳤다. 다른 지역 출신 선수들은 부모가 프로에게 맡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충청도 아버지들은 다르다. 박세리의 아버지 박준철씨나 장정의 아버지 장석중씨는 자기가 모르는 것을 배워가면서 딸을 직접 지도하지 않았나. 생업까지 포기하고."

문종성 유성여고 체육부장은 충청도의 지독한 바짓바람을 성공의 원동력이라고 단정한다.

김주연의 아버지 김용진씨도 딸을 직접 지도한 경우다. 김씨는 "체력 보강을 위해 주연이에게 중학교 때부터 고교 2학년 때까지 매일 15층 아파트를 10번씩 오르내리도록 시켰다. 내려올 때는 집중력을 키우기 위해 뒷걸음으로 내려오도록 했다"고 털어놓았다.

#풍수지리적인 해석도 있다. 대전 사람들은 계룡산 옥녀봉의 음기 덕분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옥녀봉은 대전 쪽으로 향하던 계룡산 줄기가 멎은 듯하다 다시 솟은 야산. 대전시 골프협회 탁광선 차장은 "유성골프장을 감싸고 있는 옥녀봉의 영향으로 충청도 출신 여자 골퍼들이 두각을 나타낸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고 말했다.

대전=신동재.정제원 기자

느긋한 성격, 골프에 딱 !
체육과학연서 분석한 '과학적 근거'

'충청도의 힘'은 과학적으로 얼마나 근거가 있는 것인가.

한국체육과학연구원의 이명천.김병현 수석 연구원과 이순호 책임 연구원은 "상당히 근거가 있다"고 입을 모은다. 운동학에서 '생활양식의 관리'(Lifestyle Management)라는 말이 있다. 보통 때의 행동방식이 알게 모르게 경기에 투영되기 때문에 평소 행동에 유의해야 한다는 뜻이다. 1990년대 한국 여자탁구 1인자 유지혜는 평소 화를 내지 않기로 유명했다. 화를 낼 경우 경기에 미치는 악영향이 컸기 때문에 많이 참았다는 게 본인의 실토다. 골프든 탁구든 경기 도중 화가 나면 십중팔구 템포가 빨라진다. 빠르면 실수가 나오게 돼 있다. '느림'은 '골퍼가 체득해야 할 마지막 기술'이라고 할 정도로 중요하다. 그런 면에서 충청도 사람들의 기질은 골프와 통하는 면이 많다고 본다.

골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술이나 체력이 아니라 자신감이다.

80년대 후반, 이은철이라는 재미동포 사격선수로 인해 국내 사격계가 발칵 뒤집혔다.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쏘는 족족 10점 과녁에 명중하니 그 기세에 눌려 다른 선수들은 얼어버렸다. 이은철은 1위로 대표에 선발돼 후배들과 함께 태릉선수촌에 입촌했다. 그러나 그 격차가 좁혀지는 데는 채 1년이 걸리지 않았다. "같이 먹고 자며 훈련하는데 뒤처질 이유가 없다"며 후배들이 자신감을 갖게 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박세리는 지역 후배들에게 '성공 모델'이자 동기 부여의 대상이다. "이웃집 세리 언니도 미국 가서 해냈는데, 우리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자신감을 갖고 미국에 건너갔고, 성공을 거두고 있다. 부모의 열성적 지원은 장단점이 함께 있다. 선수가 긍정적으로 부모의 지도를 받아들이면 효과가 있지만 귀찮게 생각한다면 역효과가 날 것이다. 다른 지역 선수들은 '간섭'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충청도 출신 골퍼들은 대부분 부모의 지도에 순응한 것으로 분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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