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을 가꾸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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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5백36돌 한글날을 맞는다. 이날을 맞으면서 우리는 매년「나라 말씀」을 우리의 글자로 적기 위해 한글을 창제한 세종 임금과 그때의 국어학자들의 노고를 생각하며, 아울러 일제의 국어말살정책에 항거하여 국어 지키기에 일생을 바친 선각자들의 고초를 생각한다.
더욱이 일본의 교과서 역사왜곡 사건과 그로 해서 야기됐던「민족주의사관」논의가 아직도 식지 않고 있는 올해엔 특히 한글날의 의미가 유다른 데가 있다.
그것은 한글창제가 나라 글자의 창제라는 의미에 그치지 않고 그로 해서 비로소 잠자고 있던 민족의식이 깨우쳐지고 아울러 백성의 주인 됨이 새삼 부각되었다는데 있다.
그 점에서 올해의 한글날은 민족의 혼, 민족의 넋을 상징하는 한글의 의미를 더욱 되새겨야 하리라고 생각된다.
우선 말과 글이 민족정신의 표현이며 민족자존의 상징임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말과 글의 정책은 아직도 미흡함이 너무 크다는 점에 상도하게 된다.
한글날을 정하고 이날을 공휴일로 보내는 것으로 정부의 국어국자 정책수행이 다 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일제식민치하였던 1933년 조선어학회가 제정한「맞춤법 통일안」은 광복37년이 지난 오늘에도 전반적인 손질을 못한 채 방치돼있다.
물론 근년에 정부는 맞춤법, 표준말, 외래어 표기법, 로마자표기법 등 네 가지 어문관계법 개정안을 마련하고 조사연구를 통해 그 타당성을 확인하여 확정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개정안은 한편 마련된 이후에 3년 동안 역시 방치된 채 먼지만 뒤집어쓰고 잠자고 있다.
그것은 우리 문교당국이 근본적으로 말과 글의 정책에 대한 아무런「비전」을 갖고 있지 않다는 뜻이고 동시에 말과 글의 중요성을 아직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정부의 인식이 그러하기 때문에 아긱도 나라의 말과 글의 문체를 도맡을 국가기관이 세워지지 않고 있으며, 학교문법의 통일과 우리말 순화의 올바른 진전을 이룰 수 없는 처지가 되고있다.
그러니까 놀 한글날만 되면 나라 말을 같고 닦아 빚내야 된다 거니, 곱고 아름답고 올바른 국어사용으로 국민의 정신과 마음을 순화하고 우리생활을 윤택하게 하자거니 하는 구호들은 한갓 헛소리요 빈 푸념에 불과하게 마련이다.
정부가 말과 글에 대한 인식도 없고 또 국어와 국자에 대한 사랑과 열정도 없으면서, 체계적인 국어국자의 연구나 보호가 잘 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정부의 정책이 그러한데 하물며 민간의 국어사랑, 국어 가꾸기 운동들이 제대로 추진되어 올바른 결실을 거둘 수도 없다.
그런 이유에서 우리는 매년 한글날을 맞을 때마다 정부의 말과 글의 정책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고 아울러 국어국자문제를 지속적으로 담당할 국가연구기관의 창설을 제안해 왔던 것이다.
오늘의 시점에서도 그런 주장은 역시 되풀이되는 수밖에 없다.
단지 거기에 덧붙여야 할 것이 있다면 새로운 시대조류에 호응하여 우리의 말과 글을 이용하는 방도도 좀더 세련화 해야겠다는 것을 들 수 있다.
늘 한글의 우수성을 강조하고 자랑하는 데만 그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말과 글의 생활을 현대화하고 합리화하는 노력도 있어야겠다는 뜻이다.
급속한 경제적 사회적 발전에 맞추어 우리의 문자생활을 기계화하는 데에도 관심을 기울이자는 뜻이다.
컴퓨터의 발달 보급은 우리 문자생활에도 획기적인 새 시대를 열고 있다.
한글의 기계화는 많은 난관이 있으나 필연코 조속히 달성되어야할 과제가 되고 있다. 어찌 한글뿐이랴. 한글과 한자를 함께 사용할 수 있는 기계적 기능은 지금 매우 필요한 단계에 있다.
타자기와 텔렉스. 그리고 컴퓨터 인력장치의 자판배열을 비롯하여 기호와 접속장치의 표준화도 시급하다. 또 한글 한자 동시사용 워드프로세서의 개발, 표준화도 급한 상황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글날은 단지 한글을 창제한 날을 기념하는데 그쳐서는 안되며, 또 국민들이 한글의 가치와 자랑만을 높이는데 그쳐서도 안 된다고 하겠다.
오늘 우리가 깨닫고 노력해야할 것은 그런 우리의 말과 글을 생활 속에서 가다듬고 올바로 이용하는 능력을 개발함으로써 더욱 그 의미를 높여야 한다는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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