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의 중요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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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정부가「외교문서 공개법」이라는 것을 만들어 일정기간이 지난 대외문서를 공개하기로 한 것은 이미 때늦은 감은 있지만 마땅히 해야할 일이다.
현재 검토 중인「외교문서 공개법」에 따르면 8·15해방과 정부수립 전후의 외교문서 중 30년 지난 것을 학술자료로 제공한다는 것이다.
물론 대외 비로 규정된 문서 중에 어떤 것들은 그것이 공개될 경우 우리의 국가이익에 해가 될 수도 있고 한국과 특정국가와의 관계에 마찰을 빚을 수도 있긴 하다. 그러나 구미의 대부분의 나라들이 25년 내지 30년 지난 기밀문서들을 일반에 공개하고있는 것을 보면 그런 자료들의 공개가 역사의 정확한 기록과 이해에 주는 기여가. 가끔 있을 수 있는 불이익을 상살 하고도 남는 것이라는 경험적인 판단에 근거를 두고있는 것이리라.
특히 우리 현대사의 경우 8·15해방은 바로 남북분단의 혼란으로 연결되고 거기다가 또 6·25라는 비극이 따랐다. 그래서 중요한 자료들은 유실되거나 미국을 비롯한 외국사람들의 손에 넘어갔다. 애당초 기록이 작성, 보관되지 않은 경우도 많아 자칫 우리 민족사에 하나의 공백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우려까지 없지 않다.
따라서 외교문서공개의 제도화는 사건의 기록과 그 기록의 보관을 철저히 하는 조치와 병행되어야 한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기록에 소홀한 국민이 되어 버린 것 같다. 우리에게는 기록이 생활화하여 있지 않다. 구미선진국의 경우를 보아도 박물관을 구경하는 학생들까지도 거의 예외 없이 열심히 공책이나 수첩에 기록하면서 전시품을 구경한다.
미국 사람들의 기록성은 더욱 놀랍다. 각료들의 발언은 빠짐없이 체제 있게 기록, 정리되어 있다. 공직에 있는 사람이 오늘 이말 했다가 내일 저말을 하다가는 자리보전이 어렵게 된다.
공직에 있는 사람들의 경우뿐 아니다. 구멍가게 규모의 사업을 하는 사람들, 보통 직장에 다니는 장삼이사들도 각종 영수증, 사용 필의 개인수표, 편지 따위를 서류 캐비닛에 분류, 보관하고 있다. 그래서 미국을 기록의 나라라고도 한다.
그렇게 기록이 생활화하고 있으니 대외관계에 관한 것을 포함한 정부문서들의 공개에 관한 제도가 일찍부터 정착되어있을 수밖에 없다. 외교문서 공개법의 제정은 우리도, 특히 공직자의 경우 기록하고 보관하는 일을 생활화하는 계기가 되어야한다. 허술한 기록 중에서도 가장 완벽하게 기록, 보관되고 있는 것이 외교문서다. 그것은 대외관계의 특수성 때문이고, 「기록의 나라」들을 상대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각료나 정치인들이 기자회견을 하거나 그 밖의 계기에 발언을 할 경우 그들이 그 이전에 했던 발언과 성명의 기록을 한번쯤 들춰본다면 그 발언은 저절로 신빙성이 있고 권위가 있을 것이다. 과거의 발언을 잊어버리고는 어떤 고위관리나 정치인도 기자회견 한번 할 엄두를 못내는 풍토가 책임정치의 기초적인 조건이 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외교문서 공개법의제정은 단순히 30년 지난 문서를 공개하는 제도적 장치를 만드는데 그치지 말고 그 적용대상을 확대해 하나의 제도로서 고정시켜야 하고 또 기록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새로이 하는 계기로 삼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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