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버스타고 가본 시골장 김숙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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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장바구니를 들고 시장에 들어서는 것이 즐거워진다.
도시에서 말로만 듣는 풍년을 이곳에서 얼마쯤 피부로 느낄 수있기 때문이다.
탐스러운 빛깔로 익어 나와앉은 사과·배·햇밤이며 조금 성급하게 따다 익힌 풋감등의 과일과 자주빛으로 윤이 자르르 흐르는 햇고추, 거기다 다래같은 산과도 선을 보인다.
내가 사는 곳에서 얼마 떨어져있지 않은 소읍인 K장날이 5일과 10일이라는 것을 알아 낸 나는 옛날처럼 「장이 선다」는 말 부터가 마음을 들뜨게 하는지라 초닷새 장을 보러 K읍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차창밖으론 다소곳이 고개숙인 벼이삭이 따끈한 초가을볕에 속알갱이를 익혀가고 그걸 지키는 허수아비는 옛날과 달리 트레이닝 상의나 T셔츠를 입고 들 가운데 서 있었다.
장날을 찾아나서는 목적은 값싸고 좋은 물건을 산다는 것보다 영악하고 타산적으로 살게 마련인 도회인의 마음 한구석에 그리움으로 괴어 있는 「소박한 옛날」을 만나러가는 그런 감정이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장사꾼의 손을 거쳐서 우리가 사게되는 채소나 과일·곡식이나 양념같은 것도 우리가 땅의 소산으로 고마와 하기에는 거리가 먼 느낌이고 때에 따라서는 그것이 땅에서 난다는 사실조차 실감하기 어려운 경우도 없지 않은 것같다.
비바람을 걱정하며 애간장을 태우고 김매고 보살피느라 볕에 그을고 손마디가 거칠대로 거칠어진 진짜 농사꾼들이 살붙이 인양 살뜰히 가꾸어 얻은 결실을 들고 나와 파는 그런 모습들이 보고 싶었고, 또 그런것들을 직접 흥정하며 사보고 싶었던 것이다.
버스에서 내리자 길 좌우엔 예의 그 소박한 장수들이 즐비해 있었다.
올망졸망한 씨앗즈머니의 주둥이를 겉으로 여러번 접어 열어놓고앉은 씨앗장수며, 옥수수장수, 그리 오래지 않은 옛날 크림 행상들이 하듯이 동동 북을 울리며 다니는 고무줄장수 아주머니, 햇밤·햇고추·가을 솎음배추까지 골고루 구경하그 다니다 나는 조그마한 구멍뚫린 양재기에 예닐곱개 배와 갓난아기주먹보다 더 작은 풋감 몇개룰 놓고 파는 아주머니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차시간 급해서 헐하게 팔고 갈란다. 떨이 해조(줘)고마.」
반말지거리로 잡는 아추머니의 손길에서 물씬 친근감이 일었다.
『요기 까만거 아무 일 없다. 우리집 기와지붕에 가지가 닿은 자국이라. 아지매 다 가져가고마.』
볼품도 별로 없는 배와 감을 그소박함에 이끌리어 떨이해 준다는 가쁜한 선심을 더 얹어 사게 되었다.
이만큼 걸어오다 돌아보았을 때. 아주머니는 다시 곁에 놓인 커다란 비료부대에서 내가 산 분량만큼의 배와 감을 꺼내놓고 있었다.
상술로 화술도 다 애교(?)가 있어서 웃음이 나왔다.
나처럼 소박한 정에 약한 이를 만나면 또한번 수월한 떨이를 할 수있으리라 생각하면서.

<대구시수성구시지동 경북아파트31l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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