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과 기다림의 이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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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쥬우신구라』가 이렇게 원수를 갚는 이야기라면 그와는 달리 『춘향전』은 한을 푸는 이야기라 할수있다.
『춘향전』은 퇴기의 딸인 춘향과 사또의 아들 이도령과의 사랑이야기다.
그러나 이야기의 전개는 단순한 사랑의 즐거움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별한 이도령을 기다리는 이야기이요,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는「한」의 정을 나타낸 이야기다. 만약 춘향이 서울로 간뒤 소식을 끊은 이도령을 미워한다면 그것은「한」이 아니라 「원」이 될것이다.
아니 그보다도 신관 변사또가 폭력으로 춘향이의 절개를 꺾으려는 이야기가 중심이 된다면 그 또한 「한」이 아니라 「원」의 드라머가 되었을 일이다.
옥중의 춘향이 형장에서 매를 맞고 피투성이가 된 그 춘향이의 수난만을 본다면『춘향전』은『쥬우신구라』와 다름없이 「원수를 갚는 이야기」로 끝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때 춘향은「아사노」가, 그리고 그가신들이 「기라」에 대해서 품고 있었던 것처럼 변사또에 대한 증오심과 복수심에 불타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춘향전』의 핵심은 어디까지나 이도령에게 향해 있는 것이지 변사또에게 향해 있는 것이 아니다. 변사또에 대한 미움보다는 이도령을 만나보고 싶은 감정이 언제나 한 옥타브 높은 것이다. 그러므로 변사또의 출현은 「원」이 아니라, 「한」의 감정을 증대시키는 역할을 위해 마련된 곁가지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그것은 변사또에 대해「복수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만나고 싶던 이도령과의 재회로 「한을 푸는 이야기」다. 그 증거로 『춘향전』을 읽는 독자들 역시 이도령이 암행어사가 되어 춘향이를 구출해주는 그대목에서, 변사또의 응징보다는 두사람의 재회에 대해 눈물을 흘리고 박수를 치게 된다. 실제로도 『춘향전』에서는 『변사또를 봉고파직 하렷다』는 간단한 말로 처리되어있는 것이다.
『쥬우신구라』는 「기라」의 목을 쳐서 그것을 주군에게 바치는 것만으로 끝날수 있는 드라머지만 『춘향전』에서는 아무리 변사또의 목이 그 수중에 들어온다 하더라도 이도령을 재회하지 않는한 그 이야기는 종결될수 없다. 변사또에게서 받은 수모와 그 핍박을 복수한다 해도 「원」은 풀리나 이도령을 만나고 싶은 그「한」은 여전히 남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어째서 일본의 이야기에는 복수담(원수갚는 이야기)이 그렇게 많은가를 알수 있고, 어째서 또 한국에는 원수를 갚는 이야기보다는 기다리는 이야기들, 이별의 이야기들이 그렇게 많은가를 알수 있을 것이다.
한국소설의 비조라 할수있는 『금와신화』를 읽어봐도 거기에 등장하는 귀신은 원수를 갚는 원귀들이 아니다.
지상에서 이루지 못한 사랑의 꿈을, 말하자면 그 한을 풀고 저승으로 떠나는 귀신이야기다. 즉 난리가 일어나서 호병들에게 죽음을 당한 이생의 처는 유령이 되어 돌아온다. 멋도 모르는 남편과 3년동안을 같이 살고난 뒤 한을 풀고나서야 비로소 그녀는 눈을 감고 저승으로 떠난다. 이것이 한국인의 특유한 「거듭 죽음」의 사유다.
원은 『쥬우신구라』처럼 칼로 갚고 한은 『춘향전』처럼 기다림과 참음으로 푼다. 그래서 같은 쇠를 가지고 일본인들은 세계에서도 그 유례가 없는 일본도를 만들어냈고 한국인들은 세계에서 가장 크고 잘 울리는 에밀레종을 만들었다. 『쥬우신구라』는 칼을 뽑는데서부터 시작하여 칼의 피를 씻는 것으로 끝나지만, 『춘향전』은 만나는데서부터 시작하여 다시 만나는 자리에서 끝난다. 원은 피로써, 한은 눈물로써 씻는다.
원수를 갚으려면 보다 날카로운 칼이 있어야한다. 그러나 한은 아무리 잘드는 칼로도 풀수없는 것이다. 에밀레의 종소리와도 같은 호소의 목소리, 그흐느낌 소리같은 시시절절한 소망의 울림에 의해서 그 응어리는 풀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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