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 도청 '핵폭풍'] 아무도 안 열려는 '판도라의 상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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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린우리당 문희상 의장이 10일 천안 충남도당에서 열린 확대간부회의에서 참석자들의 의견을 듣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10일 국회 대표실에서 유승민 비서실장의 보고를 듣고 있다. 김형수 기자

"도청 테이프를 수사 단서로 삼을 수 없는 상황에서 굳이 수사검사들이 도청 테이프를 틀어 볼 필요가 있겠는가."

검찰의 한 고위 간부는 전 안기부 도청팀장 공운영(58)씨 집에서 압수한 불법 도청 테이프 274개에 대한 수사팀의 접근 여부를 묻는 질문에 이같이 설명했다.

이 관계자의 설명에 따르면 수사팀은 공씨에 대한 공소 유지에 필요한 부분, 즉 누구와 누구의 대화를 도청했다는 정도만을 조사할 뿐 도청 테이프에 담긴 내용에는 일절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연세대 유석춘 교수도 10일 '불법 도청 테이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주제로 한 정책토론회에서 "불법 도청의 산물인 테이프를 검찰이 수사를 위해 내용을 듣는 것 자체가 간접적 도청 행위"라고 지적했다.

◆ "테이프 내용을 알 필요 없다"=김종빈 검찰총장은 지난달 25일 출입기자들에게 "불법으로 수집된 자료는 증거능력이 없고, 이를 토대로 수사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밝힌 바 있다.

김 총장의 발언 이후 서울중앙지검 도청수사팀은 압수한 274개의 도청 테이프를 밀봉해 안전한 장소에 별도 관리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수사팀의 한 관계자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압수한 테이프가 도청에 의한 것이냐 여부이지 어떤 내용이 들어 있느냐가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또 다른 검찰 관계자도 "법을 집행하는 것이 소명인 검찰로서는 테이프 내용을 공개하는 것은 물론 그 내용을 근거로 수사에 착수할 수 없는 일"이라며 "테이프 내용 공개를 위해 정치권에서 거론 중인 특별법 제정은 검찰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중요 공안 사건의 경우 서울중앙지검 공안부장-서울중앙지검장-검찰총장으로 이어지는 지휘 체계 보고와 중앙지검 공안부-대검 공안부-검찰총장으로 이어지는 기능별 보고 가운데 어디에서도 테이프 내용에 대한 보고는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게 대검 고위 간부의 설명이다.

문재인 청와대 민정수석도 10일 "검찰로부터 (테이프)내용 보고를 받지 않는다는 방침은 계속 유지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앞서 노무현 대통령은 3일 "불법 도청 테이프 내용에 대한 처리 방향이 정해지기 전까지 나는 물론 비서실도 내용에 대한 보고를 받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 "수사 단서로 삼지 말아야"=검찰 내부에서는 불법 도청 테이프 내용을 수사 단서로 삼아야 하느냐를 놓고 다소 의견이 엇갈리고 있지만 '수사 단서로 삼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많은 검찰 관계자는 "일부 언론과 시민단체 등이 언론에 보도된 도청 테이프 내용을 근거로 삼성그룹의 불법 정치자금 제공 여부에 대한 수사를 촉구하고 있지만 검찰의 입장은 앞으로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김종문 기자 <jmoon@joongang.co.kr>
사진=김형수 기자 <kimh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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