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3년 전 일 모른다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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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국가정보원이 "국민으로부터 사랑받는 정보기관으로 거듭나겠다"며 과거의 불법 도청 사실을 고백한 게 5일이다. 그 후 며칠간의 상황은 국정원의 희망과 정반대로 가고 있다.

'국민의 정부 때도 도청했다'는 발표에 직격탄을 맞은 김대중 전 대통령과 민주당은 음모론을 내세우며 펄쩍 뛴다. 야당은 "현 정부에서도 도청을 계속하는 것 아니냐"며 의문을 제기한다. 급기야 일부 한나라당 의원은 "국정원을 해체해 국민을 도청 공포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는 성명까지 냈다.

국정원이 '뼈를 깎는 고통을 감수하며' 고백을 했는데도 논란이 확산되는 것은 왜일까. 무엇보다 국정원이 밝힌 국민의 정부 시절 불법 감청의 진상이 모호하다. 국정원은 디지털 휴대전화 도청 방식 등 기술적 설명에 치중했을 뿐, 의혹의 핵심인 누가 지시했고, 누가 보고를 받았으며, 어떤 사람이 대상이었는지 설명하지 않았다. "2002년 3월 장비를 폐기하면서 관련 자료를 없애 정확히 알지 못한다"는 해명으론 부족하다. 불과 3년4개월 전의 일인데 아는 사람이 없다면 말이 안 된다.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국정원은 이미 실체의 상당 부분을 파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야 대선 후보를 도청했느냐는 질문에 국정원 간부는 "전혀 없었다"고 말했다. 특정한 내용이 포함돼 있는지는 일부만 알아도 답변할 수 있지만 '그것은 없다'는 말은 전체를 모르고서는 나올 수 없다. "일부 고급 첩보가 나오자 유혹을 떨치지 못하고 수집해 활용했다"는 대답 역시 내용 파악이 됐을 때 할 수 있는 얘기다.

물론 도청의 공소시효가 남아있다. 처벌 논란으로 이어질까 국정원은 곤혹스러울 것이다. 그렇다 해도 국정원이 진정 새출발을 하겠다면 스스로 모든 것을 공개해야 한다. 그것도 다른 쪽에서 실체를 밝혀내기 전이어야 한다. 검찰 또는 특검이 국정원이 감춘 부분을 찾아내면 국정원의 거듭나겠다는 다짐은 빛이 바랠 것이다.

강주안 정치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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