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류환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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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나는 적어도 중류는 된다.
즐거운 생각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사회는 뿌리가 깊고 넓다. 비바람에 무너지지도, 흔들리지도 않는다.
일본사람들은 10명중 9명은 그런 생각을 갖고있다고 한다. 최근 일본 총리부의 「국민생활 의식조사」에서 밝혀진 사실이다.
우리 나라도 그런 사람들이 적지 않다. 지난해 9월 중앙일보 독자조사에서도 한국인 10명 가운데 8명은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다.
물론 이것은 가계의 실상과는 거리가 멀 수도 있다. 어떤 커뮤니티 속에선 월10만원의 수입만으로도 중류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엄격히 말하면 「중류환상」이다.
그러나 「환상」이라고 자조해선 안 된다. 우리는 빵만 먹고사는 것은 아니다. 그 환상 속엔 희망과 기대가 있다.
「영국신사」라면 「중류층」의 심벌이다. 바로 그 영국정부의 사회조사국이 「중류」를 정의한 일이 있었다.
전문적 직업, 종업원 50인 이상의 경영자, 중급이상의 관리직(간부), 군의 장교는 「중류의 상」. 교사, 소규모 경영자, 화이트 칼러, 세일즈맨은 「중류의 하」.
미국 사회학자 W·밀은 좀 삭막한 표현을 하고 있다. 『최고의 미국적 가치는 지금까지 금?에서의 성공에 있다.』 중류를 규정할 때도 역시 돈이 중요한 척도가 된다.
밀은 바로 여기에 실소를 보내고 있다. 적어도 돈을 획득할 수 있는 「능력+센시빌리티(감성)+인텔리전스(지성)」를 갖춘 삶이라야 멋이 있다는 얘기다.
사실 「중류」를 산술적으로 계산해낼 수는 없다. 정답과 공식이 따로 없다. 그러나 비록 환상일망정 「중류」라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있다.
첫째는 경제적 토대. 지진이 나도 흔들리지 않는 내진성이 얼마나 강하냐가 문제다. 항산(일정한 재산)이 없으면 항심(꾸준한 마음)이 없다는 공자의 말도 있다.
둘째는 안정된 직업. 즐거운 마음으로 보람을 갖고 일할 수 있는 직업. 이런 직업을 가진 사람은 스스로 사명감도 갖고 있다.
세째는 건강. 육체적 건강 못지 않게 정신건강이 중요하다. 가정의 화목은 그런 심신의 건강 속에 있다.
네째는 외견. 몸에서 풍기는 멋이다. 옷이며, 매무새, 청결감은 모두 외견과 관계가 있다.
끝으로 지성. 내면에 스며있는 멋. 이것은 하루 아침에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조건들이 알맞게 어우러질 때 비로소 중류의 안정된 삶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사회나 중류계층이 많을수록 안정과 화평을 구가할 수 있다.
중류환상은 그런 조건의 한둘을 갖추었을 경우이며 이처럼 중류를 꿈꾸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그 사회가 지향할 바가 무엇인가를 가르쳐준다. 그 점에선 우리도 일본과 다를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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