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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핵정책 '3중 잣대' 논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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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4차 6자회담의 핵심 쟁점이었던 '평화적 핵 이용'문제와 관련, 미국이 북한.이란.인도에 서로 다른 '3중 잣대'를 적용하고 있다는 국제적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미국이 북한에 대해서는 평화적 목적의 핵 개발을 포함해 일체의 핵을 폐기하라는 엄격한 잣대를, 이란에는 조건부 허용이라는 유연한 잣대를, 그리고 인도에는 현실적 잣대를 적용함으로써 형평성을 잃고 있다는 지적이다. 아시안 월스트리트 저널은 8일 "북한과 이란 핵 문제의 중심에는 미국의 강경한 핵확산 방지 전략이 자리 잡고 있다"고 보도했다. 평화적 핵 이용이란 각국이 핵확산금지조약(NPT)에 가입해 핵무기 개발을 포기할 경우 원자력 발전 등 평화적 목적으로 핵 에너지를 이용할 수 있는 권리를 뜻한다.

◆ 북한에는 엄격한 잣대=미국은 베이징에서 열린 4차 6자회담에서 북한에 가장 엄격한 잣대를 들이밀었다. 핵무기와 핵무기 관련 프로그램은 물론 경수로 같은 민수용 핵 프로그램도 일체 폐기하라는 것이다. 이번 6자회담이 휴회 사태를 빚은 것도 바로 미국과 북한이 평화적 핵 이용 문제를 놓고 끝까지 대립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북한이 1985년 NPT에 가입한 뒤 국제원자력기구(IAEA)를 속여온 것은 물론이고, 94년 체결된 북.미 제네바 합의에도 불구하고 뒤에서 핵 개발을 했기 때문에 평화적 핵 이용을 허용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이에 대해 북한의 김계관 수석대표는 "우리가 패전국도 아니고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왜 평화적 핵 활동을 할 수 없느냐"고 반발했다.

◆ 이란에는 유연한 잣대=미국은 그동안 이란에 대해 군수.민수용 등 모든 핵 프로그램을 허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해 왔다. 그러나 미국은 5일 이란이 핵무기를 포기할 경우 평화적 핵 이용은 허용할 수 있다는 조건부 허용 쪽으로 선회했다. 톰 케이시 미 국무부 대변인은 이날 "유럽이 이란의 핵무기 프로그램을 종식시키기 위해 내놓은 제안을 지지한다"고 밝혀 평화적 핵 이용을 묵인할 방침을 밝혔다. 이란과의 핵 협상을 주도하고 있는 영국과 프랑스.독일 등 유럽연합(EU) 3개국은 이란이 핵무기 개발을 포기하면 원전용 연료를 제공하겠다고 제의했다. 미국이 입장을 바꾼 것은 이란은 ▶NPT 회원국이고 ▶IAEA의 핵 사찰을 성실히 받고 있으며 ▶핵무기 보유가 5~10년 뒤에나 가능할 것으로 보이는 등 북한과 다르다는 판단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 인도에는 현실적 잣대=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은 지난달 18일 핵무기 보유국이며 NPT 미가입국인 인도에 대해 민수용 핵 기술을 판매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NPT 미가입국에 대해 핵 기술 제공을 금지해온 기존 정책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조치다. 미 행정부는 이 결정에 대해 "인도는 민주적인 동맹국이기 때문"이라고 군색한 변명을 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 조치가 '중국 견제'라는 전략적 목적에 따른 것이지만 핵 확산 금지 기준을 자의적으로 적용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최원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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