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민영법 부결] 일본 정국 격랑 속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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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일본 정국이 격랑에 휩싸였다. 예상대로 '우정 법안 부결 →중의원 해산→총선 실시'의 수순에 돌입했다. 1955년 탄생 후 일본 정치를 쥐락펴락해 온 만년 여당 자민당이 93년에 이어 사상 두 번째로 야당으로 전락할 위기에 빠졌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는 2001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자민당을 깨부수겠다"는 출사표로 집권에 성공했다. 정계.관계.재계의 유착으로 대표되는 자민당의 낡은 체질을 개혁하겠다는 공약이었다. 그러나 그의 호언장담은 개혁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폭'으로 실현될 가능성이 농후해졌다.

◆ '자폭 해산'침울한 자민당=내각책임제 국가인 일본에서 중의원 해산권은 총리의 고유권한이다. 총리가 조기 총선을 통해 재신임을 받고, 정치적 위기를 돌파하는 전가(傳家)의 보도(寶刀)로 사용돼 왔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총리의 중의원 해산은 이번이 20번째다. 그러나 고이즈미 총리의 이번 해산은 상식 밖의 카드로 받아들여진다. 자민당에 승산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자민당 의원들은 '자폭 해산'이란 말로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

자민당은 현재 중의원 의석 480석 중 249석을 차지해 과반 의석을 확보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은 사정이 다르다. 우선 총선 전에 자민당의 분당이 확실시된다. 지난달 중의원에서 실시된 우정법안 표결에서 중의원 의원 51명이 반대하거나 기권했다. 고이즈미 총리는 이들을 공천하지 않겠다고 이미 선언했다. 따라서 51명의 리더 격인 가메이 시즈카(龜井靜香) 의원 등은 신당을 만들어 출마할 계획이다. '진정(眞正) 자민당'이란 당명까지 이미 만들었다. 이들이 탈당하면 자민당 의석은 200석 이하로 줄어든다.

게다가 소선거구제 실시 등 정치 개혁으로 자민당의 득표력은 크게 떨어진 상태다. 연립 파트너인 공명당의 협력이 없었으면 벌써 제1당에서 밀려났을 것이란 분석도 있다. 자민당과 공명당은 '지역구는 자민당에, 비례대표는 공명당에'란 선거전략으로 서로 표를 몰아주고 있다.

◆"집권 앞당겨졌다" 자신만만 민주당=제1야당인 민주당은 최근 수년 동안 눈부신 약진세를 보이고 있다. 2003년 중의원 선거에선 그 전보다 40석 많은 176석을 확보, 자민당 위협 세력으로 부상했다. 일본 언론들은 당시 '양당 체제가 확립됐다'고 평가했다. 지난해 7월 참의원 정원의 절반을 뽑는 선거에선 자민당보다 많은 의석을 차지했다. 올 6월 도쿄 도의원 선거에서도 민주당이 승리했다. 민주당은 "고이즈미 총리의 중의원 해산으로 집권 시기가 빨라졌다"며 결의를 다지고 있다. 민주당은 발 빠르게 지역구 후보를 확정하고 선거 공약 작성에 들어갔다.

◆정국 혼란=민주당이 제1당이 되더라도 과반수에는 못 미칠 것이란 전망이 유력하다. 각 지역구의 세력 판세를 바탕으로 한 민주당 의석 확보 전망은 220석 안팎이다. 정당 간 이합집산을 통한 연립정권의 출현이 불가피하다. 현재 자민당의 연립 파트너인 공명당(34석)은 표면적으론 민주당과의 연립 가능성을 일축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후유시바 데쓰조(冬柴鐵三) 간사장은 "정책 실현을 위해선 민주당과의 연립 가능성도 열려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창당을 앞두고 있는 신당의 리더 가메이 의원은 "선거 이후 자민당과의 협력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다"고 여운을 남기고 있다. 공명당과 신당이 일본 정국의 캐스팅 보트를 쥐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우정 민영화 법안이란=우편저금과 간이생명보험을 합쳐 360조 엔의 금융 자산을 보유한 우정의 금융 부문을 민영화하는 게 골자다. 법안은 2007년 4월까지 우정공사를 해체한 뒤 지주회사 아래 창구(우체국 업무).우편.저금.보험회사 등 4개사로 나누고, 2017년 3월 말까지는 저금.보험의 금융 2개사를 민영화한다는 내용이다.

도쿄=예영준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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