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첨된 복권모아 재미|20여년간 펜팔로 수집한 금상원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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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맞아서 기쁘고 안 맞아도 그만인 ××복권…』귀에 익은 선전문귀처럼 복권은 당첨될 경우 일확천금을 안겨주는 반면 낙천되어도 그 돈이 공공사업을 위해 쓰이기 때문에 흐뭇하다.
그러나 상금과 관계없이 낙첨된 복권을 수집하는 일로 취미생활을 즐기고 짭짤한 돈벌이도 하는 복권수집가가 있다.
특히 88년 올림픽을 앞두고 우리나라에서도 올림픽복권 발행계획이 추진되고 있어 수집가들을 들뜨게 하고있다.
20여 년 동안 세계 각 국의 복권을 수집, 그 방면의 전문가로 꼽히는 금상원씨 (52) 는 『올림픽복권발행을 계기로 우리나라복권도 증권성과 예술성을 높여 외국의 복권과 어깨를 겨룰 수 있어야 한다』 고 주강했다.
금씨가 소장하고 있는 복권은 세계30개국에서 발행된 10만여장. 이중 64년 동경올림픽과 72년 삿쁘로(찰황)동계울림픽, 76년 몬트리올 올림픽복권이 가장 소중한 목록이다.
동경울림픽의 경우 59년부터 64년까지 10개현도에서 발행하는 일본복권에 올림픽마크를 삽입, 관매수익의 2%를 올림픽조직위원회에 기증하는 형식으로 환경조성사업을 별였다.
1백엔짜리 복권 1등에 5백만엔까지 상금이 주어졌고 올림픽경기장 입장권 4백95장도 경품으로 내놨다.
동경올림픽의 경우 대회준비자금 61억엔중 3억6천만엔을 복권수익금으로 충당했다.
몬트리올 올림픽복권은 올림픽사상 유례가 없는 대회준비자금 4억3천만달러중 54%인 2억3천만달러를 복권판매수익으로 충당했다.
10달러·1달러·50센트짜리등 3종류로 발행됐던 몬트리올 복권은 사상최대의 상금인 1백만 달러(1등)를 내걸어 더욱 유명하다.
올림픽복권의 유래는 1950년대쯤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 올림픽 복권의 역사는 오히려 세계적인 수준을 넘는다.
1947년12월 한국올림픽 위원회 안재홍회장(당시 군정장관) 은 48년 런던올림픽을 앞두고 대회 참가경비 마련을 목적으로 「올림픽후원권」을 발행했다.
액면가 1백원짜리 1백40만장을 발행한 올림픽후원권은 5등까지의 당첨자 21명에게 1백만원(1등)까지 상금을 주었다.
올립픽후원권은 복권앞면에 세계올림픽위원회에 가입서류를 제출하러 미국으로 가던 중 군용기추락사고로 순직한 전경무씨(당시 체육회부회장)의 사진을 실어 더우 인상적이다.
올림픽후원권은 현재 국내에 1백여장밖에 남지 않아 희귀한 편으로 1장에 1만원을 홋가한다. 그러나 당시 후원권에 덤으로 나눠줬던 5원짜리기념우표가 2만5천원까지 거래되는 사정과 비교하면 후원권의 가치가 과소평가 되고 있는 듯한 인상.
복권발행의 역사는 16세기로 거슬러 울라가 프랑스가 최초로 복권발행법을 제정, 국가수입을 올리는 방편으로 이용했다.
영국은 17세기에 복권수입으로 신항로 개척을 위한 원청자금을 마련했고 대영박물관·웨스더민스터다리 건립자금뿐만 아니라 제1차 세계대전의 전비 (전비) 도 복권수입에 의존했다는 일화가 있다.
우리나라는 올림픽후원권 이후 49년 재해대책자금 조성을 위한 후생복권을 비롯해 애국복권 (51∼58년), 산업박람회복권(62년) , 무역박람회복권(68년) , 주택복권 (69년∼현재) 등 6종을 발행했다.
우리나라 복권수집인구는 5백∼6백명 정도로 아직은 미개척분야. 이 때문에 회귀한 복권을 값싸고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잇점도 있다.
펜팔을 통해 세계 각 국의 목권을 섭렵해온 금싸는 목권수집이 취미생활은 물론 각 국의 역사와 문학를 이해하는 좋은 자료가 된다고 말했다.
금씨는 20년동안 매주40여장씩의 주택복권을 구입하지만 지금까지 10만원짜리 상금이 최고액수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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