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 교재가 ‘수능 교과서’ … 학생들 답만 달달 외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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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A고교 3학년 김모(18)군은 올해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준비하면서 EBS 영어 교재의 답안 100여 개는 그냥 외우다시피 했다. 지문 자체가 까다로운 데다 답지에 나온 해설만으론 이해가 안 됐기 때문이다. 김군은 “지문이 어려워 답지의 해설을 보는 것인데 해설도 불친절해 혼자서는 도통 무슨 소린지 알 수 없었다”며 “지문을 이해하기보다는 답안을 그냥 외웠다”고 말했다.

 ‘불친절한’ 사례를 ‘EBS 수능 특강’으로 예를 들면 영어영역 6강 1번은 18세기 철학자인 흄의 일화를 소개하며 ‘진보’라는 개념의 상대성을 묻고 있다. ‘Progress thus never represents anything more than the in a given direction’이라는 문장의 빈칸에 들어갈 단어를 고르는 문제였다. 정답은 ‘③maximum progress’였는데 복문과 중문이 만연체로 뒤섞여 있어 해석이 쉽지 않다. 그러나 해설지엔 이 단어가 빈칸에 들어가야 할 이유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지 않다. 대신 해석에 있는 내용을 요약한 문장 하나만 있을 뿐이다.

 수능 문항의 오류가 잇따르면서 연계 출제되는 EBS 교재의 품질 논란까지 일고 있다. 문항의 질이 떨어지고 관련 해설이 부실해 혼자서는 학습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일부 학교에선 EBS 교재가 교과서처럼 쓰이기도 해 이번 기회에 EBS 수능 연계 정책을 재고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서울 B고교 3학년 오모(18)군은 “EBS 지문은 영문보다 국문으로 된 해석과 해설이 더 어려워 ‘언어영역’이라고 농담도 한다”며 “해설지만으론 혼자 문제 풀고 정리하기 힘들어 EBS 교재를 가르치는 학원에 따로 다니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서울 C고교의 한 영어교사는 “고3 학생들은 1년 동안 EBS 교재에 나온 2000~3000개의 지문을 공부해야 한다”며 “답지의 해석을 읽어도 이해하기 어려워 중하위권 학생들은 혼자 공부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더 큰 문제는 고교 수업을 비정상적으로 파행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서울 D고교 국어교사는 “교과서를 통해 기본 개념을 배우고 문제지를 통해 복습하는 정상적인 공부 방식이 교실에서 무너졌다”며 “EBS 교재가 곧 교과서가 돼버린 현실이 씁쓸하다”고 말했다.

 당초 EBS 연계 정책의 목표였던 학습 부담 경감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교육시민단체인 사교육걱정없는세상 구본창 연구원은 “EBS 교재를 전문으로 가르치는 학원이 있을 정도”라며 “EBS 70%는 모두 다 하니까 나머지 30%를 위해 별도의 사교육을 받는다”고 말했다.

 김종우(양재고 교사) 진로진학교사협의회장은 “멀쩡한 교과서를 놔두고 EBS 문제집이 주가 되는 수능 연계 출제 방식을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최인철 고려대 영어교육과 교수는 “EBS 교재는 검토 과정이 부실해 난이도가 들쭉날쭉하고 교육과정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며 "교과서에서 수능 문제를 내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강수용 EBS 출판사업부장은 “EBS 교재 오류가 부각되고 허점투성이라고 하는데 철저한 검토과정을 거치고 있고 정말 퍼펙트한 교재”라며 “수능 연계 교재 102권 중 오류는 단 8건으로 매우 적다”고 말했다.

윤석만·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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