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 '불법 도청 테이프 공개'로 급선회 조짐

중앙일보

입력

여야가 무더기로 발견된 옛 안기부 불법 도청테이프의 내용을 공개하는 방향으로 급선회하는 분위기다.

정치권은 불법 도청테이프가 발견된 뒤 지난 99년 일부 도청테이프를 처분한 이건모 전 국정원 감찰실장이 표현한 것처럼 '상상을 초월할 대혼란'을 우려한 듯 테이프 내용 공개에 대해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오직 민주노동당만이 "도청테이프는 진실 규명과 국민의 알 권리 차원에서 모두 공개해야 한다"고 밝혔을 뿐이다.

그러나 테이프 내용을 공개해야 한다는 국민 여론이 다수로 나타나면서 여야 지도부도 적극적인 입장을 보이기 시작했다.

열린우리당은 2일 테이프 내용 공개를 포함한 이 사건의 실체적 진상규명을 위해 '국정원 불법도청 테이프 처리에 관한 특례법'을 제정하는 방안을 추진키로 했다.

정세균 원내대표는 2일 오전 국회에서 고위정책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현행법 테두리에서 테이프 공개와 진상규명을 하는데는 한계가 있다"며 이 같이 밝혔다.

불법도청으로 취득한 정보의 공개를 엄격하게 금지하는 현행법 테두리에서 테이프 공개와 진상규명을 하는데는 한계가 있는 만큼 한시적인 특별법을 제정하겠다는 것이다.

특별법안에는 이른바 '제3기구' 설치와 관련된 내용이 담길 것으로 보인다. 우리당은 1일 도청테이프 공개여부와 기준을 결정할 '제3기구' 설치를 제안한 바 있다.

우리당의 한 핵심관계자는 "테이프 내용을 공개하지 않더라도 결국 내용이 다 흘러나가게 돼 있다"며 "차라리 테이프 내용을 공개하자는 원칙 아래 정치권이 나서서 어디까지 내용을 공개할지에 대해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편이 낫다"고 설명했다.

여기에는 공개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라면 공개하고 그 처리는 사회적 공론 절차를 통해 해결해 나가야 한다는 청와대의 의중도 작용했다는 후문이다.

테이프 내용 공개에 대해 상당히 거부감을 보여왔던 한나라당에서도 적극적인 분위기가 감지된다.

박근혜 대표는 1일 기자회견에서 "전혀 한나라당은 (내용 공개에) 부담을 갖고 있지 않다"며 "테이프 내용에 대해 전부 공개돼도 상관이 없다는 입장"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박 대표의 언급은 우리당의 제3기구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지만, 어찌됐든 한나라당 지도부의 입장변화로 해석될 소지가 있는 언급이다.

그러나 이미 언론에 공개된 '1호 테이프'가 정국을 메가톤급 충격에 빠뜨릴 정도의 위력을 가졌던 점으로 미뤄볼 때 정치권이 실제로 테이프 내용을 공개키로 최종 합의에 이를 수 있을 지는 미지수다.

한나라당 내에서는 박 대표의 언급에도 불구하고 과거 정권 및 대권 후보와의 관계 때문에 테이프 내용 공개에 대해 반대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당 내부에서도 테이프 내용 공개에 부정적인 여론이 적지 않은 분위기다. 특히 도청 테이프 가운데 상당수가 야당시절 김대중 전 대통령과 관련된 내용일 수 있다는 점 때문에 국민의 정부 출신 의원들과 호남권 의원들이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디지털뉴스센터,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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