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건설, 베트남 항만공사 중단 피해 … ISD 덕에 승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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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3면

국내 기업들이 투자자-국가간 소송(ISD· Investor-State Dispute) 제도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등 추진 과정에서 “주권을 포기하는 독소조항”이란 지적을 받았으나 실제론 국내 기업의 권리를 구제하는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이다.

 18일 법조계에 따르면 SK건설은 지난 7월 말과 9월 중순 두 차례에 걸쳐 베트남 정부에 ISD 소송 방침을 통보하는 협상 요청서를 보냈다. “베트남 국영기업인 V사와 진행 중인 소송과 관련해 베트남정부가 법원에 압력을 가한다면 국제법상 ‘사법정의의 부정(denial of justice)’에 해당한다”는 내용이었다. SK건설은 요청서에서 “2004년 체결된 양국간 투자보호협정 위반으로 ISD소송을 낼 수 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SK건설이 이처럼 ISD 소송 제도를 활용하기로 한 것은 베트남 현지의 재판이 불공정하게 진행될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SK건설이 V사에서 발주한 ‘반퐁 항만 신설공사 프로젝트’ 중 1단계 공사를 수주한 것은 2009년 말. V사 측은 공사 기간을 2010년 3월~2011년 11월로 정한 뒤 SK건설이 공사를 진행할 수 있도록 건설 현장을 곧 확보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사업 초기부터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계약 체결 1년이 지나도록 현장에 있던 어업장 등을 철거하지 못하는 등 공사가 지연됐다.

 공사가 지지부진한 가운데 베트남정부는 2011년 비상 경제 조치의 일환으로 국영기업이 진행 중인 모든 투자 프로젝트를 전면 재검토하라고 지시하면서 반퐁 항만 프로젝트가 중단됐다. 이에 SK건설은 2012년 9월 베트남국제중재센터(VIAC)에 “V사는 프로젝트 연기와 중단으로 입은 피해·기대 수익 등 1180억 베트남달러(VND·한화 60억여원)를 배상하라”고 중재신청을 했다. 지난 1월 중재센터는 654억 VND(33억여원)을 배상하라고 결정했다.

 SK건설은 이 중재판정을 근거로 올해 2월 부산항에 들어온 V사 소유의 대형 화물운송선을 가압류했다. V사 측이 현금을 공탁해 가압류를 푼 뒤 하노이 법원에 강제집행 취소소송을 내면서 2라운드가 시작됐다. 이 과정에서 SK건설 관계자가 V사 측 간부로부터 “베트남 정부가 법원에 영향력을 행사해 V사 쪽에 유리한 판결이 나올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발송된 ISD 소송 관련 협상요청서는 효과를 나타냈다. 베트남정부 측에서 진의를 타진해온 것이다. 뒤이어 하노이 법원은 지난달 V사 측 청구를 기각했다. 이 사건을 담당한 김승현 미국 변호사(법무법인 태평양)는 “불공정한 재판도 ISD소송 대상”이라며 “해외에 투자한 국내 기업들이 ISD소송의 존재만 기억해도 억울한 피해를 보는 일은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다.

 앞서 중견 건설회사인 안성주택산업은 지난달 “장쑤성 골프장 건설 사업이 지방 정부의 약속 위반으로 무산돼 150억원대 손해를 입었다”며 세계은행 산하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ICSID)에 중국 정부를 상대로 ISD 소송을 내 중재가 개시됐다.

조강수 기자

◆ISD=외국인 투자자가 투자 유치국의 법령·정책으로 피해를 입는 경우 국제 중재를 통해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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