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3470)제78회 YWCA 60년(26)6·25 동란|김신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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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48년에 열렸던 제15회 임시전국대회 및 하령회에서 앞으로는 대회를 2년에 한번씩 열기로 결정했다. 연합위원은 세 카테고리로 6년 위원, 4년 위원, 2년 위원으로 하기로 했다. 전체연합위원이 24명이라면 2년마다 개최되는 대회에서 8명만이 바뀌는 폭이 된다.
제15회 전국대회에서 결정된 대로 49년을 건너뛰고 50년에 제16회 전국대회에서 선거한 결과 총무였던 최례순씨가 회장이 되고 부회장에 김성보·양매륜씨, 회계 이「마리아」씨, 서기 박「마리아」씨, 총무서리에 김신실씨가 됐다. 이때부터 김활난박사가 임원진에서 빠지게 되는 것은 후원회 이사장직을 맡았기 때문이었다.
비교적 새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양매륜씨는 1910년 이화학당을 졸업, 30년대에 YMCA회장으로 활약하던 양주삼 목사의 부인으로 원래 김매륜씨였지만 남편 양주삼 목사의 성을 따라 양매륜씨로 통했다. 양주삼씨는 감리교회의 최고직인 감독까지 했고 6·25 동란 때 이북에 납치되어 생사를 모른다. 양매륜씨는 재작년 타계했다.
최례순씨는 33년 이화여전 영문과를 졸업하고 교직에 있다가 36년 도미하여 종교교육을 전공하고 석사학위를 받아 40년 귀국했다. 이화여전에서 가르치다가 43년 필자의 경우나 마찬가지로 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선생들을 파면할 때 다같이 파면 당했다. 6·25 동란 조금 전 제16차 전국대회에서 회장으로 피선되었다.
의장직을 맡고 두 달쯤밖에 안되었을 때 전쟁이 일어났고 전쟁이 나자 괴뢰군은 YMCA, YWCA를 가장 큰 반동이라고 생각했던지 두 기관의 최고 책임자가 다 납치되었다. 그때 최례순씨는 세 번째 아기를 분만한지 열흘밖에 안되었을 때였고 아직 회복도 되지 않았는데 납치된 것이다. 물론 이북으로 끌려갔고 다시는 소식을 모르고 있다.
최례순씨는 학생 때부터 학교 안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인기가 있었다. 미모가 뛰어난 데다 사교적이어서 모든 사람에게 호감을 주었다. 필자는 같은 이전 2년 후배로 항상 부러워하던 선배였으며 40년에는 같은 해 가을에 똑같이 미국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같이 학교에 있으면서 일제 말의 고역도 함께 치렀던 선배다.
그의 상냥한 웃음은 지금도 눈앞에 보는 듯하다. 그 화려하면서도 귀하게 생긴 얼굴에 누구에게나 웃어주는 것이 그의 특징으로 그와 가까왔던 친구들은 지금도 그를 잃은 것을 아쉬워한다. 아직 30대 한창 일할 수 있는 정열을 가졌었고 잘못한 일도 없었는데 납치되어버린 것이다.
정치하는 사람도 아닌 YWCA사람을 납치해간 북괴의 행태는 이해할 수 없다. 민주주의적 사고를 하는 사람은 다 반동인 모양이다. 그때 민주주의식 사고에 의해서 행동한 사람은 다 당했는데 『나야 경당운동도 안 했고 정부의 요직에 있었던 것도 아닌데 뭐 어쩔라구』하는 안이한 생각으로 피신하지 않은 사람들이 그렇게 납치된 경우가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
반대로 조금 걱정이 되어 숨어서 끝까지 버티었던 사람들은 무사했다.
이때 YWCA는 4월에 회장이 되었던 최례순씨만이 희생되었다.
6·25가 시작되던 때는 도봉산에 있는 YMCA 캠프장에서 직업여성클럽 캠프가 간사 손인실씨 주재아래 열리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북괴의 남침 소식은 믿어지지 않은 일이었지만 도봉산은 38선에 가까운지라 캠프의 하루의 일과도 채 끝나기 전에 거두어 가지고 뿔뿔이 헤어져야만 했다.
이것이 이 나라를 초토화하고 수많은 한국인은 물론이려니와 우방의 젊은이들의 값진 목숨을 앗아간 잔인한 전쟁이 될 줄이야 누가 꿈엔들 생각했으랴.
미일전쟁 때 직접 총칼을 들고 싸우지 않았기 때문에(의용군·학생병으로 끌려나가 희생된 수는 꽤 되긴 하지만) 당시 미국·일본·유럽에서는 독일·이탈리아·영국 등 제2차 세계대전을 직접 치른 나라들같이 많은 희생의 댓가를 치르지 않고 독립이 됐다고 모두들 무혈의 독립을 찬양했었다.
그러나 북한의 철없고 욕심스러운 행위 때문에 이제 겨우 되살아나려고 움직이고 있던 생명들이 무자비하게 짓이겨진 한국의 그 당시의 운명은 너무 비참했다. 그러나 그렇게도 절망적이던 한국인, 한국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재건할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했던 것을 우린 알아야 할 것 같다.
무책임한 정부를 욕도 해보고 원망도 해보았지만 끊어진 한강다리를 쳐다만 보면서 꼼짝 못하고 주저앉아 있어야만 했던 처지였다. 그래도 유엔이 어떠한 방식으로라도 도움을 줄 것이라는 일말의 희망을 품었기에 말이지-그것도 실날같은 것이었지만-아니면 자살이라도 하고싶은 심정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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