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 도청 테이프 유출] 천용택 전 국정원장, 공씨와 뒷거래 없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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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안기부 비밀도청팀(미림팀)을 이끌던 공운영씨의 존재가 알려진 것은 1999년. DJ정부 2년차 때다.

한 재미동포가 삼성 측에 도청 테이프를 사라고 요구한 것이 계기가 됐다. 당초 요구 금액은 10억원이었으나 6억원까지 내려갔다고 한다. 삼성은 국정원에 신고했다. 국정원은 조사 끝에 이 테이프가 새 정권 출범 후 국정원 물갈이 작업 와중에 면직된 공씨가 들고나간 것임을 확인했다. 공씨는 흔히 '더블백'으로 불리는 큰 자루 두 개 분량의 테이프와 녹취록을 반출한 것으로 파악됐다.

당시 국정원은 천용택 원장 체제였다. 천 원장 등 수뇌부의 지시로 국정원은 즉각 공씨를 조사했다. 그 결과 불법 도청 사실과 도청 테이프의 존재를 밝혀냈다. 하지만 천 원장 등은 공씨로부터 테이프를 회수했을 뿐 문제를 확대하지 않았다. ▶불법 도청 행위는 물론 ▶이 과정에서 얻은 테이프를 사적으로 갖고 나갔고 ▶이 중 일부를 유출시킨 행위는 명백한 국정원직원법 위반이라는 게 당시 법률해석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덮였던 도청 및 테이프 유출 사건은 이번에 다시 불거졌다. 국정원은 즉각 당시의 일 처리 과정에 대해 점검했다. 이를 통해 국정원은 당시 천 원장이 공씨와 타협해 테이프를 되돌려 받는 조건으로 사건을 무마했다는 혐의를 잡은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공씨가 천 원장 개인의 테이프는 물론 당시 여권 실세들의 대화를 도청한 테이프를 무기로 거래를 시도했다는 점을 확인했다고 한다. 공씨가 자신을 건드리면 테이프 내용을 폭로하겠다고 해 파장을 우려한 국정원 수뇌부가 공씨를 사법처리하지 못했다고 한다.

공씨가 보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요구조건을 제시하면서 협상을 했다는 설도 있다. 공씨가 당시 실세인 P씨를 찾아가 자신을 해직한 국정원에 복직시켜 달라고 요구했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이때 공씨는 도청 내용 가운데 DJ와 민주당의 대선자금 부분을 카드로 썼다는 얘기도 있다. 당시 P씨는 "국정원 문제이니 천 원장이 처리토록 하라"고 국정원에 일임했으나, 천 원장은 당시 퇴직 국정원 직원들의 모임인 '국사모'(국가를 사랑하는 모임)가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상태에서 특정인만 복직시킬 수 없다며 반대했다고 한다.

국정원 주변에선 거래의 대가로 공씨가 이동통신 대리점 사업권을 따냈다는 소문도 있다. 대리점 사업엔 국정원 시절 친하게 지냈던 C씨가 참여했다는 얘기도 흘러나오고 있으며, C씨가 P씨와 공씨 사이를 중개했다고 한다.

국정원 측은 당시 천 원장 측이 공씨에게서 회수한 도청 테이프 가운데 일부를 여권 핵심인사들에게 건넸다는 혐의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여권이 테이프를 토대로 야당에 대한 정치공세 자료로 활용한 것 같다"고 국정원 고위 관계자는 말했다.

그는 테이프 회수 직후 여야 갈등이 첨예하게 치닫자 P씨가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를 거명하면서 "내가 입을 열면…"이라고 공개 경고한 대목을 상기했다. 또 천 원장 자신의 해임을 불러온 '대선자금'발언도 도청 테이프와 무관치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천 원장은 99년 말 검찰 출입기자들과 만나 "97년 정치자금법 개정 이전에 모 대기업 측이 DJ에게 정치자금을 보내왔다"고 말했으며 1주일 후 전격 경질됐다.

공씨는 최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DJ정권으로 바뀐 뒤 쫓겨나면서 당한 게 서러워 (도청 테이프를) 들고 나왔다가 반환했다"면서 "나도 살아야 하니까 다 (돌려) 주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중앙일보는 천 전 원장의 해명을 듣기 위해 이날 자택과 비서의 휴대전화를 통해 연락을 시도했으나 연결이 되지 않았다.

이철희.이정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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