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초저금리가 부른 전세대란, 주택 정책 확 바꾸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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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초저금리 시대가 삶의 풍경을 바꾸고 있다. 은행 정기예금은 1%대로 떨어졌다. 물가상승률을 감안한 실질금리는 마이너스로 돌아선 지 오래다. 은퇴한 직장인이 퇴직금 3억원을 금리 연 1.9%짜리 정기예금에 넣어두면 세금 빼고 손에 쥐는 돈은 한 달 40만원이 채 안 된다. 퇴직금을 받아 은행에 넣어두고 이자를 받아 은퇴 후 노년을 설계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가라앉은 경기 탓에 주식시장도 몇 년째 제자리걸음 중이다. 조금만 수익률이 높은 상품이 나오면 곧바로 없어지기 일쑤다. 최근 15조원의 청약금이 몰린 삼성SDS 상장은 그 단면이다. 탈출구가 돼줘야 할 자본 시장이 정부의 촘촘한 규제와 업계의 천수답 영업으로 제 기능을 못해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다. 예컨대 퇴직연금 등 각종 연금 상품의 수익률이 0%대에서 맴돈 지 몇 년째다. 그런데도 투자 한도와 대상은 고금리 시대의 기준에 따라 여전히 엄격하게 제한되고 있다. 그 바람에 굴릴 곳을 못 찾은 단기 부동자금만 늘어나 지난 8월 말 현재 757조원으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정부·업계의 정책과 제도, 서비스가 바뀐 시장의 패러다임을 전혀 쫓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가장 극적인 변화가 이뤄지고 있는 곳은 부동산 시장이다. 초저금리는 전세의 종말을 가져왔다. 월세가 빠르게 늘면서 전세가 사라지고 있다. 집주인 입장에선 전세금을 은행에 묻어두는 것보다 월세를 받는 게 훨씬 유리하기 때문이다. 임대차 시장에서 월세 비중은 2011년 32.9%에서 올해 41.6%로 늘었다. 전세를 앞지르는 건 시간 문제다. 하지만 정부의 주택 관련 제도나 지원은 대부분 전세 지원에 맞춰져 있다. 고작 전세금 대출 금리를 낮춰주는 수준의 정책으로는 바뀐 시장의 패러다임을 쫓아갈 수도, ‘전세대란’을 막을 수도 없다.

  국토교통부는 10·30 부동산 대책 등에서 전세보다 월세에 초점을 맞춘 정책을 내놨다. 문제는 속도와 폭이다. 시장은 빠르게 변하는데 정부 대책은 뒤쫓아가기 바쁘다. 월세는 더 이상 저소득층에 다세대·다가구주택 시장에 한정된 얘기가 아니다. 월세 주택 공급을 확 늘리는 과감한 정책 전환이 필요하다. 미국·독일 등은 임대사업자에게 세금 부담을 확 낮춰주는 등 파격적인 지원을 한다. 공공이 못하는 임대주택 공급 기능을 지원하는 파트너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우리도 개인 위주의 임대업자 대신 부동산 임대회사를 시장에 끌어들이는 쪽으로 방향을 바꿔야 한다. 기업형 임대회사가 정착되면 시장이 투명해지고 집주인과 세입자 간 갈등도 줄어든다. 임대인의 반발로 세금을 걷지 못하는 조세 불균형도 바로잡을 수 있다.

 초저금리 시대는 한 개인이나 집단의 힘으로 막을 수도 되돌릴 수도 없다. 정부부터 앞장서 바뀐 패러다임에 맞는 정책을 고민해야 한다. 그런 게 진짜 민생이요, 행복대책이다. 언제까지 중산층이 그나마 없는 돈을 굴릴 곳도 없어 손가락만 빨며 불안한 노년을 속절없이 맞이하게 내버려둘 셈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