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골은 한국전서 패배할까봐 고심했다" |「퐁피두」 전 대통령, 회고록 『하나의 진실회복』서 밝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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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조르지·퐁피두」전 프랑스 대통령의 회고록 『하나의 진실회복을 위해』가 최근 파리에서 출판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드골」장군의 뒤를 이어 69년 대통령에 당선됐던「퐁피두」자신의 생전의 기록과 각종 서한·자료 등을 모아 그의 미망인「클로드·퐁피두」여사가 펴낸 이 회고록은「드골」전 대통령을 측근에서 줄곧 지켜보았던 그의 증언이 주류를 이루고 있어 회고록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증언에 가깝다. 이 책의 내용 중 「한국전쟁」당시의「드골」의 심경, 69년4월 「드골」의 하야주변에 관한 「퐁피두」의 증언을 요약해서 소개한다.
◇한국전쟁주변=47년4월「프랑스인민연합」(RPF) 이란 정파를 창설했던「드골」은48 ,49년 두 차례의 프랑화 평가절하, 군부의 동요, 모로코·인도지나·튀니지 등에서의 소요 등 불안정한 국내외 정세를 크게 우려하고 있는 상태였다.
1950년12월4일.
「드골」장군은 한국전쟁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이렇게 피력했다.
『한국에선 실패를 하고 있소. 인도지나에서와 마찬가지요. 전쟁의 초기에 민주주의는 실패되기 마련입니다. 그리나 이 같은 실패를 이겨낼 필요가 있소. 패배에 동의해선 안돼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아시아형 뮌헨」을 허용해선 안 된다는 말입니다.
프랑스로 이야기를 돌려봅시다. 일반적인 정세로 보아 이런 가정이 가능합니다.
소련은 당분간 전면전을 바라지 않고 있다는 가정이지요. 이런 때 프랑스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우선 원폭을 보유해야 할 것입니다.
기본목표를 위해 필수적인 무기를 확보해야 합니다. 결국 「무장」해야한다는 말입니다. 드골 장군은 2차 대전 후 세력균형의 재편과정에서 공산자유세계가 가질 자세를 확고하게 밝히고있으며 그의 이런 신념은 자유진영의 지도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드골」은 한국에서의 실패로 유엔이 어떤 영향을 받게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침략 앞에서 흔히 민주주의는 처음에 군사적 실패를 겪게 됩니다. 한국이 그렇고 인도지나가 그렇습니다. 확고한 신념을 갖는다면 이 같은 실패를 이겨 낼 수 있습니다. 이를 참아내면 어느 날인가 만회할 길을 찾아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국지전이 조만간 세계대전으로 확대될 위험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드골」장군의 하야전야=58년12월 대통령에 당선된 「드골」장군은 10년 뒤인 68년5월. 학생혁명의 소용돌이를 맞게되면서 이해 5월30일 의회를 해산한다. 이 와중에서「드골」은 잠시 서독의 바덴바덴을 방문하게되는데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당시 서독주둔 프랑스군의 충성도를 점검키 위한 것이 그 방문목적으로 돼 있었다.
이번의 「퐁피두」회고록은 이 같은 정설을 뒤집고「드골」이 한때 서독에 망명하려 했던 사실을 증언하고 있어 이채롭다.
69년4월 국민투표에서 패배한 다음날「드골」은 대통령직을 물러났으며 이해 6월 선거에서 「퐁피두」는 대통령에 선출된다. 「드골」은 다음해 1월 사망했다.
68년5월29일 극심한 소용돌이 속에서「드골」은 좌절했다. 바덴바덴에의 여행은 군부의 지지를 겨냥하고 취해진 「드골」의 연극이 아니라 「망명」의 시작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같은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나 자신 이러한 사실을 역사가 모르기를 바랐지만 아무래도 진실을 말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사실 「드골」은 심한 패배의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퇴진을 생각하고 있었다. 승부에 졌다고 생각한 것이다.
서독의 바덴바덴에 도착한「드골」은 이곳에서 장기간 머무를 모든 준비를 해놓고 있었다. 「필리프·드골」등 가족들도 모두 함께였다.
국내 정정과 관련한 계산된 술책이 아니었다. 이 같은 「드골」의 결심을 돌린 것은 당시 서독주둔 프랑스군사령관 「자크·마시」장군이었다.
「마시」장군은 용기를 내서「드골」에게 결심을 돌리도록 종용했으며 그의 생각을 바꾸는데 성공했다. 당시「드골」은 『일생 처음으로 나는 좌절했다. 내 자신에게 부끄럽다』고 심경을 토로했다.【파리=주원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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