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 칼럼] 가을걷이 끝난 들녘에서 아버지께 용서를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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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면

아버지가 애지중지하던 아버지의 나라에 벼가 익는다.

온 들녘이 황금 물결로 출렁이는 아버지의 나라, 해 뜨기 전에 시작된 일은 해가 져야 끝나는 고된 논밭 일, 아버지는 논밭이 삶이고 놀이터였으며 아버지의 나라였다.

아버지의 나라에 군데군데 벽돌이 빠져나간 자리처럼 휑하게 뚫린 곳이 있다. 콤바인이 벼를 베고 간 자리다. 30년 전만 해도 낫으로 벼를 베고 탈곡을 했지만 지금은 콤바인으로 벼를 베고 알곡은 곧바로 미곡종합처리장으로 가서 정산한다. 예전 우리 동네는 눈까지 쓸어가며 탈곡을 했었는데 지금은 불과 20여 일 안에 수확이 끝난다.

우리 마을은 청일전쟁의 발판이 됐던 곳으로 농업과 어업을 함께 하는 마을이었다. 구멍가게가 다섯 집이나 됐고 어업협동조합과 어업창고가 있어 많은 뱃사람이 드나들었다.

마을 안길 옆으로는 십여 곳의 술집이 뱃사람을 상대로 호황을 누릴 정도로 번창했었다. 지금은 아산만 방조제가 생기고 갯벌은 수십만 평의 옥토로 변해 전국에서 인정받는 아산의 맑은 쌀을 생산하고 있지만 ….

우리 집은 동네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부농이었다. 머슴을 두고 일하시던 아버지 밑에서 농사일을 배웠다. 평생 농사일을 하셨던 아버지는 굉장히 완고해 나와 동생들은 아버지를 어려워했다.

내가 용돈 좀 달라고 하면 밥이나 먹고 일만 하면 되지 네가 무슨 용돈이 필요하냐며 핀잔을 줬던 아버지. 그런 말을 들을 때면 내 목은 자라목처럼 들어갔고, 여물만 먹고 목과 어깨에 굳은살이 박이도록 일하는 황소처럼 나는 일만 했다. 몸이 파김치가 되도록 일해도 아버지는 용돈 한 푼 주지 않았다.

별다른 벌이가 없었기에 할 수 있는 일이란 농사짓는 것뿐이었다. 친구들이 사는 술을 얻어먹으면 나도 사야 하고, 담배도 사야 하는데 수중에는 돈이 없었다.

그런 자식을 아버지는 소 닭 보듯 했기에 다섯 집이나 되는 구멍가게마다 외상장부에 올라 있던 나의 1년치 외상값. 그 외상값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가을 추수가 끝나면 갚아야 했다. 우리 집에서 탈곡하는 날이면 나의 딱하고 어려운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인부들이 아버지 몰래 검불 속에 대여섯 가마의 벼를 묻어주곤 했다.

아버지의 철저한 감시의 눈을 피해 가며 숨겨줬던 벼 가마니. 그 검불 속에 묻어둔 벼는 그날 밤 친구들에 의해 정미소로 운반되고 쌀로 찧어 외상값을 갚곤 했다.

김원근 한국문인협회 아산지부장

누렇게 익은 벼를 콤바인이 수확할 때면 그 옛날 내 사정을 너무나 잘 알고 있던 인부들이 생각난다. 지금은 한 분도 안 계시지만···.

콤바인이 벼를 베기 전 말없이 소주라도 논머리에 부어 놓으며 그 어렵던 시절 아버지의 감시 속에서도 벼 가마니를 숨겨주던 따뜻한 마음을 생각해 본다.

하지만 30년이 지난 지금도 아버지를 속여야 했던 지난날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고 용서를 빌고 싶다.

김원근 한국문인협회 아산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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