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 100대 드라마 ①정치] 1. 박정희 개발독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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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공·공고생을 사랑한 박정희
1976년 부산 기계공고를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이 실습생을 격려하고 있다. 왼쪽은 김정렴 비서실장, 오른쪽은 오원철 경제2수석이다. 박 대통령과 김 실장, 오 수석은 ‘박정희 드라마’의 주인공들이다.<중앙포토>

▶ 박정희 대통령 사진을 들고 있는 김정렴 전 청와대비서실장. 최정동 기자 <choijd@joongang.co.kr>

우연하게도 중앙일보가 창간된 1965년, 박정희의 한국은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했다. 사실상의 ‘현대국가 한국’이 시작된 것이다. 박 대통령은 이때부터 1979년 10·26까지 자신의 통치구호대로 싸우면서 일했다. 야당·반정부인사·민주화운동가 그리고 무엇보다 김일성과 싸우면서 그는 ‘산업화·근대화된 국가’를 향해 질주했다. 박정희야말로 한국정치 40년의 첫번째 드라마다.

어느 드라마나 중요한 조연이 있다. 박정희드라마에서 제1 조연은 9년3개월간 청와대비서실장을 지낸 김정렴(81)씨다. 박 대통령의 집권기간 18년6개월의 꼭 절반이다.

다른 권력자들보다 덜 유명하지만 그는 누구보다도 박 대통령에게 필요한 인물이었다. 박 대통령은 그가 재무·상공장관을 해내는 품새를 눈여겨보았다. 1969년 10월 그를 비서실장으로 발탁하면서 박 대통령은 “나는 국방과 안보외교 때문에 경제를 들여다볼 여유가 없다. 그러니 경제문제는 비서실장이 잘 챙겨달라”고 당부했다. 김 실장은 박정희 경제사령관의 총참모장이었다.

김씨를 일컬어 ‘비서실장학의 교과서’라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비서실장의 본질을 꿰뚫었기 때문에 그처럼 장수했다는 것이다. 그는 불필요한 소음을 내지 않았고 자신을 철저히 낮추었다. 술잔이 도는 회식자리에서 박 대통령이 노래를 시키면 그는 두 손을 귀에 갖다대고 “산토끼 토끼야”를 불렀다. 다른 노래를 부르라고 하면 그는 “따르릉 따르릉 비켜나세요. 자전거가 나갑니다”를 불렀다. 이를 지켜본 사람들은 “김 실장이라고 뽕짝 한 소절 몰랐겠는가. 그는 ‘내가 어떻게 각하 앞에서 각하처럼 폼을 잡고 유행가를 부를 수 있겠는가’라는 생각을 가졌던 것”이라고 말한다.

김 실장에겐 이후락·김형욱·차지철 같은 권력의 오만과 방종·부패가 없었다. 그는 권력의 커튼 뒤에서 숨소리도 들리지 않게 정권을 관리했다. 박 대통령만큼이나 청렴했고 비리의 잡음이 없었다.

78년 12월 그가 주일대사로 간 후 10개월 만에 정권이 무너졌다. 박 대통령의 빈소를 찾은 그에게 적잖은 이들은 “김 실장이 있었더라면 김재규와 차지철이 그렇게 싸우거나 김재규가 박 대통령에게 총을 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9년3개월이 말해주듯 김씨는 훌륭한 도승지(都承旨)였다. 그러나 그가 대사간(大司諫)의 임무도 제대로 했는지는 의문이다. 그는 지금 “유신은 불가피했지만 운용이 반드시 옳았던 것은 아니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비서실장이라면 흔들리는 대통령에게 정권의 문제점을 용기있게 간(諫)했어야 옳다.

박 대통령의 사후(死後)에 김씨는 한눈팔지 않고 정권의 역사를 기록하는 일에 몰두했다. 90년10월 그는 박 대통령의 경제개발을 기록한 『한국경제정책 30년사』를 펴냈다. 91년 8월엔 직접 일본어로 『한국경제의 발전-한강의 기적과 박 대통령』을 썼다. 중국 신화통신사의 신화출판사는 93년 6월 이 책을 번역해 『한국경제의 등비적(騰飛的) 오비(奧秘)』로 출판했다. 중국의 많은 당·국영기업체 간부와 정부 관리가 이 책을 읽었다.

94년 10월 세계은행 경제개발원(EDI)은 정책수립 회고총서의 창간호로 김씨의 책을 선정해 출판했다. 박정희기록의 세계화가 완성된 것이다.

김씨는 97년 6월 박 대통령의 통치비사와 인간적인 얘기를 담은 『아, 박정희』를 펴냈다. 2차 회고록인 셈이다. 이 작업을 마친 후 그는 “이승에서 해야 할 일은 다 했다”고 말했다. 그는 수년 전 뇌졸중으로 쓰러진 아내를 돌보느라 힘든 말년을 보내고 있다.

김진 정치전문기자 <jin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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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모독’에 화가 나면 샌드백을 팬다
9년 근접수행 박상범 경호관

▶ 자신이 이사장을 맡고 있는 민주평통장학회 사무실에서 박상범 전 청와대경호실장이 권총을 쏘는 포즈를 취하고 있다. <최정동 기자>

박정희 대통령을 물리적으로 가까이에서 지켜본 시간이 가장 많은 이는 누구일까. 1979년 10·26까지 9년간 근접·수행 경호팀에서 활동한 박상범씨일 것이다.

그는 명실상부한 ‘박정희의 총잡이’였다. 74년 8월 국립극장에서 문세광이 총을 쏘았을 때 연단 앞에서 총을 빼들었고 10·26 때는 경호실 6명 중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총을 맞았지만 지혈이 잘 됐고 정보부요원의 M-16 확인사살이 건너뛴 덕이다.

그는 전두환 대통령의 수행과장, 노태우 대통령의 경호처장 그리고 김영삼 대통령의 경호실장을 지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에게 “어느 대통령을 가장 존경하느냐”고 묻곤 한다. 그는 빙긋이 웃는다. 얼큰하게 취했을 때 물어봐도 웃는다. “다 알면서…”라고 한다. 그는 박 대통령에 대해선 함부로 얘기하지 않는다.

그는 박 대통령을 다룬 ‘효자동 이발사’나 ‘그때 그 사람들’같은 영화를 경멸한다. 역사적 지식이나 의식도 없이 시류에 영합해 역사적 지도자에게 페인트칠을 한다는 것이다. 그는 고려대 법대를 나왔고 해병대 소대장으로 월남에 참전했다. 해병대 동지들과 어울리는 걸 제일 좋아한다. 합기도 8단인 그는 “세상 돌아가는 것에 화가 나면 집에서 샌드백을 두드린다”고 한다.

김진 정치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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