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화유출 풍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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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국내 경제사정이 어려울수록 외화를 아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외화를 버는데 쏟은 국민의 노력과 정성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요즘 빈번히 일어나는 외화의 해외 유출사건은 가뜩이나 좋지 않은 외화사정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지난 1월 13만 달러를 책 속에 숨겨 미국으로 떠나려던 대학생이 세관당국에 적발됐고 21만 달러를 밀 반출하려던 사장부부가 구속되기도 했다.
사상최대의 사기 극을 벌인 이철희-장영자 부부도 40만 달러를 해외에 도피시켰고 또 다른 40만 달러를 집에 숨겼다가 발각되기도 했다.
거기다 최근엔 34만 달러를 숨긴 여행용 가방이 김포세관에서 적발돼 경찰이 돈 임자와 자금용도를 수사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수사로는 이민허가를 받은 사람들이 법정한도액 이상으로 재산을 빼돌리려 했거나 국제밀수조직의 밀수결제자금으로 쓰려던 것으로 추측된다.
어느 경우든 거액의 외화유출을 기도했다는 점에서 국민에게 또 다른 충격을 주었다. 이들 일련의 사건이 국민 경제에는 물론 국민정신에 끼친 악영향은 매우 크다. 과연 외화도피풍조는 이제 위험수위에 이른 것일까.
불법적으로 빼돌리려는 재산은 대개 올바르지 못한 방법으로 축재한 경우가 많으며 때로는 사기에 의한 일확천금일수도 있다. 이런 재산은 적절한 조사와 절차에 따라 국내에 환원되거나 피해자에게 보상되어야할 돈이다.
한탕 잘 벌어서 외국에 나가 살겠다는 풍조가 만연한다면, 그리고 그런 파렴치한 기도가 곧잘 성공한다면 땀흘려 제 땅을 가꾸겠다는 국민들의 사기가 어떻게 되겠는가.
해외이주경비의 대폭적 인상으로 이민자금은 한 가구 당 10만 달러까지도 지참할 수 있다. 누차 지적됐지만 이것은 우리의 경제현실에 비추어 과분한 액수임에 틀림없다. 다만 그것이 해외생활의 정착을 촉진하고 우리의 잠재력을 펼쳐 보이겠다는 장기적인 목표 때문에 오늘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시행 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도 국내재산의 해외도피는 그 몰지각 성이 더욱 두드러져 보인다. 당국의 엄정한 법적 제재로 이것을 바로잡는 일이 우리 사회의 한가지 과업일 것이다.
밀수자금을 위한 외화유출도 우리 경제를 좀먹는 현상의 하나다. 만성적인 무역적자에 시달리는 우리는 최근의 세계적인 경기침체로 수출이 부진한 결과 외환보유고는 년 말의 68억 달러에서 4억 달러가 줄어들었다.
물론 외화유출이 준다고 우리의 외환보유고가 즉각 호전되는 것은 아니나 나라전체가 어려울 때는 개인이나 가정에서 모든 것을 아끼는 것이 국민 된 도리일 것이다.
더욱이 우리는 지금 3백20억 달러의 외채를 지고 있어 8백만 가구 한집마다 약 4천 달러(3백만 원)씩의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시정이 이렇다면 국내재산의 해외도피는 적발되는 대로 엄중히 다스려야하며 일선세관의 엄정한 근무자세도 요망된다.
아울러 국내 유휴자금용 생산자금으로 돌릴 수 있도록 적절한 투자 처를 찾아주는 일이 중요하다.
가정에서는 귀한 돈이 요즘엔 상상 못 할 덩어리로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모습은 보는 이도 참 민망하며 이 흔한 돈을 수령하는 데에 당국의 지혜가 모아져야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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