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정서만 70평생|정년 퇴직한「장원」지배인 박임득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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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요정 수발로 평생을 보낸 박임득씨(70·장원지배인·서울 청진동135)가 11일 정년 퇴직했다.
관공서나 회사가 아닌 일개 음식점에서 일하던 사람에게「정년퇴직」이란 걸맞지 않은 말일는지 모르지만 반세기 동안을 이 세계에서 지내며 뼈가 굵고 영감이 된 박 옹은「가업(가업)」을 장남 을봉 씨(48)에게 물려주게 돼 이 직장을 아주 떠나는 것이 아니다. 이 날 그가 몸담았던 장원에서 가진 조촐한 작별 파티에는 함께 일하던 동료들과 주인 주정순씨(61·여)가 감회에 젖은 그를 위로하며 정년퇴직을 아쉬워했다.
기자를 본 박 옹은『늙은이가 주책없이 신문에 나면 자식들 낯 깎인다』며 퉁명스럽게 대했다.
손님이 나타나면 바람처럼 달려와 깍듯이 모시기로 이름난 그도 이 날 만은 착잡했던지 「접대」가 엉망이었다.
5척 단신에 불그스레 상기된 얼굴, 흰 구두에 윈 바지, 깔끔한 줄무늬 셔츠와 은테 안경, 검게 물들인 머리가 30년대의 신사모습 그대로이다.
몸 구석구석을 살펴봐도 고희(고희)의 노인 티는 티 끝 만큼도 없다. 57년 전 17세 때 요리 집(인사동 조선극장 옆 천향원)사동 모습 그대로이다. 그는 개성 깍 정이.
일제 때 서울로 올라와 천향원에서 7년, 피카디리 극장 자리에 있던 명월 관에서 20년, 관철동·인사동 요리 집 등지를 돌다 70년 이후 장원에서 다시 10여 년.
『손님들은 다들 저를 만송 영감이라고 불렀지요. 자유당 때 이기붕 씨를 꼭 닮았다 나요.』그의 말투는 손님을 모시는 것이 몸에 배어 손자 뻘 되는 기자에게도「저」라고 했고 숱한 정객들을 접한 덕인지「이 박사 시대」후 박 대통령 시절」이란 말 대신「정권」이라는 단어를 쉽게 했다.
『요즘은 세월이 바뀌었어요. 전처럼 국회의원이나 장관 얼굴보기가 힘들지요. 경기 탓이라고들 하더군요]
한 때는 내노라 하는 정치인들이 주름잡았던 요릿집이 요즘은 큰 회사의 중역이나 외국 손님으로 바뀌어 정치무대이던 시절은 까마득한 옛날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 박 옹의 술회다.
『자유당 시절 제가 몸담았던 관철동 초남 요정은「작은 국회」라고 까지 했지요. 태평로에 있던 국회의사당은 낮에 방망이질이나 하는 곳이고 중요한 정담(정담)은 대개 우리 집에서 했으니까요.
박 옹은『요리 집에서 송진우 여운형 장덕수 김 구 신익희 조병옥 장택상 윤치영 같은 거물들을 가까이 대할 수 있었고 5·16 이후에는 정일권 김종필 김영삼 이철승 씨 등을 간혹 모시기도 했다』고 했다.
박 대통령 시절에는 한 때 대통령 내외와 이후락·이효상 씨 등 이 함께 자리한 오찬에 불려 나가 수발을 든 적도 있었다.
『요리 집에서 늙은 몸이 뭐 배운 게 있겠습니까. 그저 손님 얼굴만 보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구나 하는 것을 아는 정도지요)
『요리 집 일이란 하루 종일 매달려 있어야 하기 때문에 밖에는 커녕 집에도 가지 못하지요. 혼자 늙은 안 사람(김복점·61)이 안됐어요.』
2남 1녀를 모두 내보내고 혼자 집(광명 아파트 16동207호)을 보는 부인을 위해 여생을 함께 유람이나 하며 보내고 싶다는 것이, 박 옹의 소원.
딸이 사위와 함께 스웨덴에서 공부하고 있어 내년 4월쯤엔 부부 동반으로 외국여행을 해 볼 참이란다. <홍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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