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신용조사 않고 대출하는 은행은 늪을 향해 가는 장님 격|은행사고 왜 잦은가|이만기<한양대 경영대학원장·경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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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필자가 대학을 나와서 한국은행에 처음 취직했을 때(1957년)만 해도 은행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은 직장이었고 은행가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70년대부터 상대적으로 은행이 낙후되기 시작했고 여러 차례의 홍역을 치러 왔다. 박영복 사건, 율산 사건 등으로 여러 은행장들이 구속되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일이 종식되기는커녕 더 커지고 있다.
사실 돈을 취급하다 보면 뜻하지 않은 사고가 생길 수 있다.
얼마 안 되는 작은 사고는 거의 매일 생긴다.
그러나 이번과 같은 사건은 미증유의 큰 사고다. 이러한 사고의 근본 원인은 무엇보다도 「유비무환」이란 말을 지키지 못한 까닭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금융은 위험이 따른다. 장래에 갚는 것인데 장래의 일은 불확실한 까닭이다. 그러므로 금융업무에는 반드시 위험에 대비할 수 있는 장치가 따라야 한다. 그것은 차입 자에 대한 신용분석이다. 신용분석은 뒤집어 말하면 위험의 확률을 예측하는 것이다. 모든 기업은 차입 자 그룹이므로 모든 기업의 신용도가 분석되어야 할 것이다.
원칙적으로 신용이 있는 기업에 대출하고 신용이 없으면 대출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신용분석을 토대로 하지 않고 누군가의 지시로 대출을 하는 것은 마치 장님이 장님을 인도하는 격이다. 언제 수렁에 빠질지 모른다. 금융기관이 부실기업에 질질 끌려 다니고 때때로 희대의 사기꾼에 농락 당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장 여인이 거액의 예금을 맡기고 대출을 알선한 사례도 그와 같은 일이다. 은행이 거액의 예금을 유치하기 위해 현혹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모르는바 아니나 예금주가 알선한 기업이 과연 신용이 있는 기업인가. 그러한 기업은 필경 사채이자와 은행이자와의 차액을 융자 알선 자에게 지급할 것이다. 말하자면 기업은 대출을 받기 위해 예금을 사고, 은행은 예금을 얻기 위해 부실대출을 하게 된다.
대출이 기업신용보다 상부의 지시에 따르게 된 관행은 정책적인 금융지원과도 관련이 있다. 개발초기부터 정책적으로 지원해야 할 산업이 많았으며 당시에는 그러한 일이 타당하다고 말할 근거가 있었다. 그러나 개발 후기의 현재에는 이러한 금융지원이 점차 없어져야 한다. 산업구조가 고도화되고 경제규모가 커진 오늘에는 모든 산업이 다 같은 것이므로 만일 산업의 중요성을 금융의 기준으로 한다면 거의 모든 금융을 정책당국이 결정해야 한다.
거의 모든 재벌이 종합무역상사를 갖고, 중동건설에 진출하고 중화학공업에 참가하고 있으므로 중요한 산업이 따로 있을 수 없다. 이들에게는 어떤 산업이 중요하다고 정해지든 결국 모두가 해당된다. 그러므로 이제는 산업의 중요성보다 기업의 신용 도를 대출의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또한 개발초기의 성장기에는 기업의 평균이윤율이 높아서 지금보다 부실의 위협이 적었으나 점차 성숙 화되면서 평균이윤율이 낮아져서 부실의 위험이 크다.
아무리 중요한 산업이라도 적자가 누적되는 부실기업을 지원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같은 산업이라도 전문경영인에게 맡겨 잘 운영하는 기업이 있고, 연고자에게 맡겨 부실화된 기업이 있을 수 있다. 금융기관은 이러한 것을 가려야 하는데 그러한 기능이 없었던 것이다.
또 금융은 과거「돌다리도 두드린다」고 할만큼 보수적이었다. 이처럼 보수적인 금융 가에 왜 큰 사고가 빈발하는가. 오히려 금융인의 보수성이 금융산업을 낙후하게 만들었던 까닭이다. 기업은 급성장하고 국민경제는 발전하는데 금융은 보수적이어서 이를 뒤따라가기에도 바빴다.
선진국은 금융이 실물보다 더 커지고 금융산업이 기업을 앞장서서 이끌었다.
그런데 우리나라 금융은 정책당국의 많은 규제와 금융인의 보수성으로 금융의 발전이 낙후되고 금융기관이 오히려 기업에 끌려 다녔다고 말하면 과언일까.
금융시장은 일대개혁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기존의 모든 기업금융을 무시하고 일시적인 개혁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앞으로 강력한 의지를 갖고 금융시장의 방향전환이 추진되어야 한다.
김상기 차장의 예금횡령사고의 경우 근본원인은 은행경영에 인센티브가 없었던 까닭임을 지적하고 싶은 것이다. 인센티브란「유인」이라고 번역되고 있으나 쉽게 말하면「적극적인 동기부여」인 것이다.
경영인이 적극적인 동기가 없을 때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
위의 눈치나 보고 소극적일 때에 부하가 얼마나 일을 잘 하는지, 집안에 무슨 일이 있는지 적극적으로 살필 수 있는 자세가 마련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금융개혁의 첫째 방향은 인센티브의 부여라고 말하고 싶다. 조흥은행과 상업은행은 거의 1백년의 역사가 있고 다른 은행들도 수십 년의 역사가 있는 전통적인 기관이다. 이러한 장구한 역사를 가진 은행이 어찌하여 이들보다 일천한 기업들에 낙후되어야 하는가.
금융개혁의 둘째 방향은 금융운영(여신)에 대한 개선이다. 금융기관은 상대방의 신용을 토대로 차입 자와의 대등한 위치에서의 계약에 의해 금융이 이루어지고 이것은 철저히 준수되어야 한다. 이를 어긴 부실한 차입 자는 개인이든 기업이든 금융시장에서 추방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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