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도 정신 차려야 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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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카디프는 영국의 중서부 해안에 자리잡고 있는 조그마한 항구 도시다. 이곳 대학의 한 기숙사에는 영국 학생 10명과 홍콩·말레이지아·브루네이·인도·파키스탄 등 주로 영 연방 내지는 구 영국 식민지에서 온 유학생 20여명이 함께 생활하고 있다.
이 기숙사에서 지난 4월1일 아르헨티나 군대가 포클랜드를 점령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구 영국식민제국 유학생들은 박수를 치며 함성을 올렸다. 제3국학생들에게는 의외의 반응이었다.
그후에 잇달아 들어온 전쟁 소식에 대해서도 영 연방 유학생들은 일관성 있게 반영 반응을 보였다. 영국 군함이 아르헨티나 순양함 벨그라노호를 격침시켰다는 보도에 대해 『그럴 수 있느냐』고 분개하던 이들은 영국 구축함 셰필드호가 격침되자 또 한번 신나게 박수를 쳐댔다.
이날 밤 기숙사의 4평 남짓한 휴게실에서 TV를 통해 셰필드호의 격침 소식을 함께 전해듣던 영국 학생들이 평소의 자신만만해하던 태도와는 달리 침울한 표정으로 일찌감치 자기 방으로 돌아가는 뒷전에다 대고 홍콩 유학생 「리」군은 『이번 기회에 영국도 정신차려야 되다. 아마 좋은 교훈이 될 것이다』라고 핀잔을 주었다.
영 연방의 국민이 제3국 학생보다 오히려 더 반영적인 태도를 취하는데는 역사를 통해 그들이 받아온 수모 외에도 현실적인 이유가 있다.
예컨대 홍콩이나 브루네이 학생들은 대부분 영국 정부 발행의 영국 여권을 갖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학교 등록 때 외국인이 내는 차별 등록금을 내야한다.
그 돈은 영국 학생이 내는 것보다 2배가 넘는다. 『이건 시민권을 갖고도 차별적인 의무와 권리를 부여하는 2등 국민 취급이 아니냐』는 것이 이들의 평소 불만이다.
영 연방이란 어차피 대제국의 해체 과정에서 영국이 유지해보려는 영광의 잔영 같은 것에 지나지 않지만 그런대로 영국이 국제 사회에서 행세할 때 상당한 후광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 그 영 연방의 2세 지도자가 될 유학생들이 영국 함정 피격에 박수를 보낸다는 것은 영 연방의 앞날에 시사하는 바가 큰 것 같다.
역사의 그늘은 먼 미래에까지 미치는 것인가 보다.

<카디프 (영국)="진창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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