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17)<제77화>사각의 혈투 60년(35)|정복수의 다운|김영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정복수가 동양의 권투 왕으로 성장하기까지 매사가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특히 아마추어 시절 정복수에게도 난관이 있었다. 숙적이 김명석이었다.
보인전수학교에 입학한 직후인 5월.
전 일본 아마추어 선수권 대회의 조선 예선에서 정복수는 김명석과 처음 대결했다.
준결승이었다. 김명석은 조선 권투구락부 소속으로 필자와 휘문고보 동기생이다.
필자가 복싱을 배운 것은 김명석 때문이었다.
단성사와 비원 중간에 집이 있던 필자는 비원 뒤의 휘문고보를 통학하는데 큰 장애가 하나 있었다. 돈화문 앞에 진을 치고 항상 학생들을 괴롭히던 깡패들(세칭 동관파) 때문이었다.
동관파는 세검정파·영천파·시구문파 등과 더불어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그 소굴이 비원 팡 와룡동이었다.
이때 조선권투구락부를 다니던 김명석만은 이 일대를 활개치고 아녔다. 깡패들도 감히 김명석에겐 손대지 못했던 것이다. 김명석과 함께 조권에 나가면서부터 필자가 깡패들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었음은 물론이다.
김명석은 다채로운 기술의 권투를 했다. 몸이 빠르고 상대의 허실을 재빨리 간파하여 정곡을 찌르는 감각이 뛰어났다.
정복수가 첫 대결할 때 이미 김명석은 원숙한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그러나 정복수는 아직까지 천부의 강펀치와 겁 모르는 대시에만 의존하는 설익은 과일이었다.
정복수는 1회전에서 김희중을 KO시켰기 때문에 김종석을 판정으로 누른 김명석에게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오산이었다.
1라운드를 서로 어르다가 끝낸 후 2라운드에서 정복수가 회심의 일격을 노리고 라이트 어퍼커트를 뻗는 순간 김명석의 스트레이트가 먼저 정보수의 얼굴 정면을 찌르고 나왔다.
이 한방의 카운더 볼로로 정복수는 생애 유일한 다운을 기록했다. 결국 판정패했다.
4개월 후인 10월. 조선 신궁대회에서 정복수는 설욕을 다짐하며 김명석과 재 대결했다.
이때 장안에선 세기의 빅 매치라 하여 대만한 관심을 끌어 모았다. 천재소년복서 정복수가 4개월 전의 빚을 기필코 갚고 말 것이라는 기대가 충만했다.
신문들이 떠들썩하게 보도했다. 『인기의 초점이 된 차일전! 김군이 연승하나? 정군이 설욕하나? 이는 반도권투계의 최고수준에 있는 양군의 대전인 만큼 만장의 기대는 이에 쏠렸다….』
그러나 좌우 훅을 주무기로 스윙이 큰 정복수에 비해 스트레이트와 어퍼커트를 적절히 배합하며 카운터 볼로가 날카로운 김명석이 2, 3라운드에서 우세해 또 다시 판정승을 거두었다.
연속 패배의 쓰라림을 맛본 정복수는 이것으로 영원히 설욕의 기회를 잃고 말지만 김명석에게서 값진 교훈을 배웠다.
복싱은 펀치력 이상으로 기술이 중요하다는 것을 배운 것이다.
김명석과 더 이상 싸울 수 없었던 것은 정복수의 체급이 페더급으로 올랐기 때문이다.
정복수는 11월 들어 조선신궁대회 라이트급 우승자였던 박경선을 꺾고 전 일본 아마선수권대회에 조선대표로 출전, 같은 한인인 이상찬(관동대표)을 역시 판정으로 누르고 전 일본 페더급 챔피언이 되었다.
이해 말 정복수는 김인태(플라이) 김명석(밴텀) 강인석(라이트) 최용덕(웰터)과 함께 전 일본 대표의 자격으로 마닐라에 원정했으며, 40년 1월 두 번 째 마닐라 원정에선 유일하게 2KO 1판정승의 맹위를 떨쳤다.
두 번 째 마닐라 원정 때는 김인태 양정모(밴텀) 한용하(라이트) 황기저(웰터)가 일행이었다.
당시 필리핀은 세계프로복싱의 경량급에서 정상급 선수들을 배출한 복싱 강국으로 아마추어의 수준도 아시아 지역에선 으뜸이었다.
따라서 정복수가 「코르도바」「로하스」「린투마」등 필리핀 최강자들을 잇따라 일방적으로 휘몰아침으로써 동양에선 대적할 상대가 없게 되었다.
귀국하자마자 스승 황을수의 권유대로 정복수는 프로로 전향했다. 나이 열 아홉이었다.
그리고 정복수는 프로 데뷔전에서 민족의 울분을 씻어 주는 통쾌한 승리를 거두어 갈채를 한 몸에 모으게 된다.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