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은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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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430 879 XQ3.
이것은 어느 스위스은행의 무기명 구좌 번호다. 「무기명」의 주인공은 그 은행의 사람들도 잘 모른다. 그 이름은 몇 사람의 손을 거쳐야 비로소 발견할 수 있다. 마치 스파이의 암호를 캐듯 미로의 미로를 헤쳐 가야 한다.
이를테면 4번 장부를 뒤져 30번을 찾아내, 여기 기재된 지시에 따라 879의 내용을 풀고, ,다시 XQ3의 정체를 밝혀 내야 한다.
은행의 구좌번호는 세계 어느 나라나 있다. 우리나라의 예금 통장에도 장문의 숫자들이 나열되어 있다.
그러나 스위스은행의 경우는 그런 예와는 다르다. 컴퓨터의 편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예금주를 깊이 숨겨 주기 위한 번호다.
아무나 이런 구좌를 열 수 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우선 예금주 자신이 창구에 출두해야 한다. 스위스은행 창구에 배치되어 있는 사람은 이미 오랜 경륜을 쌓은 사람으로 눈치만 봐도 예금주의 정체를 짐작한다.
물론 그는 관상가는 아니다. 따라서 예금주는 자신의 신원을 밝힐 수 있는 객관적 증빙 자료를 제시해야 한다. 예금 잔고도 5천 달러이상이어야 한다.
마피아나 암흑가의 자금이 복면을 하고 이 비밀 구좌에 손을 뻗치는 경우도 있다. 스위스은행은 그런 문제로 흔히 시비의 대상이 되고 비난도 받는다.
이 지구엔 두개의 마지막 비밀이 있는데 하나는 바티칸에, 또 하나는 스위스은행에 숨겨져 있다고 한다.
내밀한 종교의 세계는 몰라도 스위스의 경우는 이유가 있다. 지난 1세기 반 동안 확고하게 지켜 온 정치적 중립과 함께 세계에서 유례가 드물 정도로 장기간에 걸쳐 자유를 지켜 온 전통이다.
어느 나라에 전쟁이나 경제 공황이 닥치면 제일 먼저 바빠지는 사람이 스위스 은행원이다. 1971년 이탈리아의 통화위기 때 스위스의 산간 벽지에 있는 은행들까지 붐볐던 얘기는 유명하다.
1978년 개 정된 스위스은행의 행동강령협정을 보면 예금주의 비밀을 누설한 경우 벌금 5만 프랑(스위스 화), 또는 6개월 이상의 징역형을 받는다.
다만 법정압류, 형사소송, 탈세 등의 경우는 비밀을 제한된 범위에서 밝힐 수도 있다. 이때도 스위스 국내법에 저촉되는 경우에 한한다.
예금의 비밀은 자본주의 체제에선 당연한 일이다. 그것은 사유재산의 보장과도 맥락이 닫는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생활(프라이버시)의 보장이다.
사람이 사는 곳엔 이런 비밀도 있어야 인간적이다. 스위스은행의 무기명 구좌는 그런 인간의 속성을 상업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문제는 범죄와의 관련이다. 이것은 엄연히 법에 의해 규제된다. 우리나라에도 그런 법이 있다.
장 여인 사건으로 은행예금 비밀보장법의 개폐까지 논의되는 것은 부도수표가 많다고 그런 제도까지 없애야 한다는 논리와 다를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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