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기려 하나 부모는 기다려 주지 않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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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수욕쟁이풍부지하고 자욕양이친부대로다.(나무가 조용 하려 하나 바람이 멈추어주지 않고 자식이 부모를 섬기려 하나부모가 기다려주지 않는다.)
이 구절은 얼마 전 할머님 산소에 다녀오신 어머니가 내게 들려주신 글귀다.
이 글귀를 어머니가 처음 접하신 것은 지금으로부터 60여년전 소학교 2학년,
그때 국어 선생님께서 칠판에 이 문장을 쓰시고 철부지들에게 뜻을 절명하시다 말고 갑자기 돌아서서 두루마기 고름으로 눈물을 닦으시더란다.
그 스승의 모습이 마음속에 아직도 생생한데 그 기억을 간직한 소학교 2학년 짜리는 지금 칠순을 훨씬 넘기신 육 남매의 어머니시며 열두 손자의 할머니시다.
그러고 보니 내게도 생각나는 일이 있다. 우리 부부가 외지에 살매 우리가 세들어 살던 아파트 옆집에 혼자 사시는 할머니가 한 분 계셨다. 공부에 쫓기는 틈틈이 우리는 저녁산책을 나가곤 했는데 어쩌다 그집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되면 할머니는 기다렸다는 듯 어김없이 쫓아 나와 우리를 붙잡고 이야기 폭포를 터뜨리곤 했다. 마치 쌓인 고독을 털어 버리듯이.
그러던 하루 네가 저녁을 준비하고 있을 때 할머니가 편지봉투를 움켜쥐고 급히 우리 아파트로 건너오셨다. 4년 동안이나 소식이 없던 아들 내의로부터 어머니날 축하카드와 약간의 돈이 왔노라며 자랑하고 픈 마음에 달려온 것이다. 너무나 기쁘고 흥분한 나머지 할머니는 눈물을 흘리셨고 마치 잃었던 자식이 돌아온 양 카드에 뺨을 비벼대며 거친 손으로 쓰다듬으시는게 아닌가. 그러나 다음 순간 이 예쁜 카드의 그림을 내 눈물로 얼룩지게 했으니 어쩌면 좋으냐고 치맛자락으로 젖은 부분을 닦으며 또 우시니 눈물방울은 다시 카드 위를 적시고 말았다.
그후 20성상이 흘렀으니 이 할머니의 무정했던 아들도 지금쯤은 할아버지가 왔을 터이고 필시 자기 자식들에겐 잊혀진 노인이 되어올 터이지. 외로움과 씨름하는 어느 순간 그토록 외로움을 안겨드렸던 모친을 생각했을 것이고 본인 위주의 생활을 살아온 인생 길 어디에선가 그르쳐버린 인간관계를 후회하지나 않았을까 내 나름대로 상상해 본다.
부모를 모시고자 하나 기다려주지 않는다고 서글퍼하시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20년 후의 내 모습이 아니라고 우리 중에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내게도 때를 놓쳐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매일이 어버이의 날이라 생각하며 아버지께 못 드려본 점까지 합쳐 어머니를 모셔야겠다 다짐해 본다. <서울 강남구 압구정5동>이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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