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07)제 77화 사각의 혈전 60년-김기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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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코리언·조">
서정권에게 최초의 패배를 안겨준 캘리포니아주 챔피언「영·토미」와의 10라운드 경기는 서정권과 도유용차낭의 사제관계에 틈을 만들고 말았다.
서정권은 차차 미국 프로 복싱계의 생리를 파악하게 되자 막대한 파이트머니를 받는 세계적 상위 랭커가 되기 위해 착실히 성장하겠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미국에 오래 머무를 수 없는 도변은 마음이 조급했다. 기대 이상으로 서정권이 쾌조의 상승무드를 타자 돈에 욕심이 생겨 절호의 달러박스(서정권)를 버려 두고 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강호「영·토미」와의 매치를 강행시켰다. 서둘러 큰 매치를 몇번 열어 한꺼번에 큰돈을 좀 만져 보자는 속셈이었다.
서정권은 4차전 때부터 파이트머니가 1천달러(당시 금액)이상으로 껑충 뛰었다.
1, 2차전 때는 60달러, 3차전 때는 75달러였다.
보통 4라운드 경기 선수는 25달러 정도 받았으니(당시 미국은 극심한 경제공황에 시달릴 때였다) 처음부터 특별한 대접을 받은 셈이었다.
도변은 파이트머니가 오를수록 착취의 농간을 부렸다.
원래 계약상으로는 파이트머니 중 비용을 제한 나머지 금액을 선수가 3분의2, 매니저가 3분의l의 비율로 배당하도록 되어 있었다.
비용을 제하지 않으면 50%를 매니저가 갖고 그것으로 일체의 비용에 충당토록 했다.
그런데도 도변은 경기 때마다 파이트머니 중 3분의1만 서정권에게 주고 나머지를 가로채는 식이었다.
이에 앞서 일본을 떠날 때부터 문제가 있었다. 동경에서 환송전을 가졌는데 1만명 이상의 관객이 입장한 대성황이었다. 이 환송전은 태평양 횡단의 대양구 배 값 등 노자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도변은 이때부터「왕서방」기질을 발휘, 3천엔 이상의 수입을 올리고도 서정권에겐 대양구의 3등실 표 값에 불과한 2백엔만 주었다.
심기가 뒤틀려 있던 서정권은 마침내「영·토미」와의 경기를 끝낸 후-더구나 첫 패배를 당해 분통이 터진 김에-호텔 로비에서 도변과 대판 싸움을 벌였다.
『선생님은 왜 돈의 분배를 부당하게 합니까』
그러자 도변은 여러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당한 부끄러움이 더 큰 노여움으로 폭발, 『이 조센진 놈이 건방지게 누구한테 대드느냐』는 식으로 호통치며 서정권의 뺨을 후려치기까지 했다.
맞붙어 싸운다면 서정권이 불리할 게 없었으나 그래도 스승이라 참을 수밖에 없었다.
이때 옆에서 충동하는 사람이 있었다. 역시 일본인으로「가도마」(문전)라는 70대 노인이었다.
샌프란시스코에 살면서 알래스카를 오가며 새(조)와 생선장사를 하는 부자였다.
권투광인「가도따」노인은 가증 정보를 알려 주며 서정권에게 친절히 대했다.
20살의 순진한 서정권은 누구나 자신에게 친절히 하면 고마왔다.
서정권이 감히 스승인 도변에게 항거한 것도 사실은「가도따」노인이 용기를 불어넣은 영향이 크다고 봐야한다.
결국 이 트러블로 서정권은 도변과 결별했다.
그리고「가도따」노인의 소개로 새 매니저를 맞았다. 47살의「프랭크·테이버」였다.
뒤늦게 깨달은 것이지만「가도따」노인도 서정권을 후원해 주는 만큼의 커미션을 뜯어먹었다. 그러나 서정권을 갈취한 것은 아니었다.
「일본의 사슬」에서 벗어난 서정권은 새로이 웅비의 날개를 펴기 시작했다.
도변과의 결별은 하나의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그때까지 줄곧「도오꾜 테러」(동경의 공포) 라는 별명과 함께『일본이 낳은 작은 KO왕으로 묘사되던 서정권이 비로소『코리언』이라고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신문들은 일제히 『코리언·조」라고 표기했다.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지는 어느 날 이런 기사를 실었다.
『지금 이 세상에는 단 한 명의 코리언 선수가 있다. 그는 세가지 이름을 가지고 있다. 코리아에서는 서정권, 일본에선「조·데이껜」, 그리고 미국에선「테이킨·조」다. 그는 여자보다 작은 구두를 신는 5피트 정도의 꼬마다. 그러나 인기는 하늘 모르게 치솟고 있다.…<중략>…코리아는 1910년 8월29일 이래 일본의 강점으로 식민지가 되어있다. 코리아의 역사를 소개하면…<하략>』
미국의 한 대도시 일간지에 처음으로 코리아가 소개된 기사인데 그것이 한 권투선수의 존재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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