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대통령 한마디로 대입정책 못 바꾼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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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노무현 대통령은 어제 "대학에 권하고 싶은 것은 1000분의 1 수재를 뽑으려 하지 말고 100분의 1 수재를 데리고 가서 교육을 잘하라는 것"이라고 밝혔다. 언론사 편집.보도국장 간담회 자리에서 서울대 2008학년도 입시안 본고사 부활 논란과 관련, 교육철학과 정책방향을 피력한 것이다. 실력과 능력의 유무에 관계없이 신입생을 선발해 인재로 양성하는 게 대학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초.중.고교 시절 평준화 교육을 받아 이미 평균인으로 성장한 학생을 대학이 무슨 재간으로 인재로 육성하라는 것인지 이해하기 힘들다. 유능하고 가능성 있는 인재를 교육하는 것이 보통인을 교육하는 것보다 훨씬 효과가 크다. 그래서 대학들은 성적이 우수한 학생을 선발하려고 노력한다. 대통령의 말대로라면 대학도 뺑뺑이 돌리기 식으로 학생을 뽑아 평준화 교육, 다시 말해 평등주의 교육을 하라는 것이다. 대학교육의 요체인 수월성 교육을 포기하라고 강요하고 있다.

교육은 두 측면이 있다. 하나는 건전한 시민으로서 갖춰야 할 지식과 덕목을 갖추는 것이다. 이런 명목으로 중.고교는 평준화 교육을 하고 있다. 그러나 또다른 측면은 사회의 엘리트 양성이다. 우수한 사람이 좋은 교육을 받아 사회 전체에 기여토록 하는 것이다. 이제는 우리끼리만 경쟁해서는 살아갈 수 없고 세계와 더불어 경쟁해야 한다. 지금도 평준화로 인해 중.고생의 실력저하가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데 이제는 평등교육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대학까지 망칠 작정인가.

한국처럼 대학 입시정책을 국가가 통제해온 나라는 찾아보기 힘들다. 수능과 내신 성적의 반영비율을 교육인적자원부가 제한하고 이를 위반하면 행정.재정적 제재를 가한다. 특히 현 정부의 대입제도 간섭은 역대 어느 정권보다도 심하다. 고교등급제.기여입학제.본고사 금지라는 3불(不)정책을 내세워 대학 자율성에 족쇄를 채웠다. 노 대통령은 "입시제도만큼은 공교육과 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만큼 대학이 양보해 국가정책에 맞춰 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즉 변별력이 전무한 9등급의 내신.수능으로 학생을 선발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1등급 2만4000명 중에서 입학자격을 갖춘 수험생을 가리기는 어렵다. 그래서 대학들은 차별화된 논술.면접고사를 통해 신입생을 뽑으려고 한다. 그런데 이마저 본고사로 변질될 우려가 있다고 노 대통령이 지적하자 전 여권세력이 규합해 서울대를 공격하는 것이다. 대학 입시 문제가 대통령에 대한 충성 경쟁으로 변질되고 있다.

교육은 정치로부터 중립이어야 한다. 정권이나 대통령이 마음대로 할 분야가 아니다. 이 원칙은 노 대통령의 경우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노 대통령의 개인 철학이나 이념이 대학교육의 정체성을 흔들어서는 안 된다. 사태가 이렇게 번진 데는 김진표 교육부총리의 책임도 크다. 서울대의 논술고사에 대해 교육부는 '긍정적'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김 부총리는 당연히 당정협의회에서 여당의원에게 설명하고 대통령에게도 바른 말로 설득했어야 한다. 대통령 한마디에 입장이 뒤바뀌니 부끄러운 일이다.

논술고사의 본고사화 논란이 가중될수록 피해는 2년 뒤 새 제도를 적용받을 학생에게 돌아간다. 아직까지 서울대 논술고사의 실체는 없다. 그것이 어떤 형태가 될지는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 한다. 논술의 구체적인 내용은 연구 중이며 교육부와 협의해 국민이 불안감을 갖지 않도록 하겠다는 것이 서울대의 공식 입장이다. 대학들이 자율적으로 입시안을 구체화하도록 맡겨두자. 특히 노 대통령의 발언이 대학교육의 경쟁주를 무너뜨리려는 단초가 아니기를 바란다. 백년대계인 교육은 유한한 정권이 좌지우지할 수 없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