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기의 反 금병매] (4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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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1면

점심 때가 되자 왕노파가 국수를 만들어 오고 술과 안주도 가지고 왔다. 금련이 사양을 하면 어쩌나 왕노파가 마음을 졸였으나 금련은 별 말 없이 음식을 먹고 술을 마셨다.

"부인이 점심 때까지만 바느질해주기로 했으니 이제 돌아가야겠네요."

할멈이 금련의 눈치를 살피며 말끝을 흐렸다.

"남편이 돌아오려면 조금 더 있어야 하니 그때까지 바느질을 하도록 하죠, 뭐, 어차피 집에 가 보았자 할 일도 없고 심심할 테니깐요."

그러면서 금련이 열린 방문 너머로 찻집 공간을 슬쩍 건너다보았다. 왕노파는 금련의 눈길이 차 마시러 오는 남자가 없나 살피고 있음을 알아채고 넌지시 미소를 떠올렸다.

"그렇게 해주면 나야 고맙지. 하루라도 빨리 수의를 지어놓아야 내가 죽더라도 안심을 하고 죽지."

"자꾸 죽는다는 말씀 그만 하세요. 할머니는 아직 일흔도 되지 않으셨는데, 아마도 좋은 차를 많이 마셔서 백살도 넘게 사실 거예요."

"아이구, 백살도 넘게 살라고? 그건 덕담이 아니라 악담이에요. 이 나이쯤 되면 그렇게 오래 살고 싶은 마음은 없고 아무쪼록 편하게 저 세상으로 갈 수 있었으면 하고 바라게 되지요. 하긴 내 나이 된 사람들도 아둥바둥 오래 살려고 온갖 약을 다 지어 먹으며 애를 쓰는 사람들도 있더군요. "

"저는 사실 나이가 젊어서 그런지 자기 수의를 미리 만드는 분들의 심정을 잘 이해하지는 못해요. 할머니처럼 자기 수의를 만들면서도 담담한 마음을 지니고 있는 분들을 보면 이미 죽음을 초월한 도사들이 아닌가 싶어요."

"도사는 무슨 도사? 어쩔 수 없이 운명을 받아들이는 거지, 뭐. 자, 그럼 일을 시작할까."

금련이 다시 바느질을 하고, 왕노파는 옆에서 도와주면서 찻집에 손님이 오면 방을 나가곤 하였다. 차 손님이 있을 때는 왕노파가 방을 나가면서 방문을 꼭 닫았다. 금련은 바느질을 하면서 방문 너머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남자 손님들은 왕노파가 일흔 가까운 할머니인데도 젊은 작부 대하듯 진한 농담들을 던지기 일쑤였다.

"할멈, 혼자 살면 적적하지 않나? 남자가 그립지 않느냐고?"

"이 늙은이한테 못 하는 소리가 없네. 내가 적적하면 당신들이 남자 노릇을 해줄 거야? 하긴 누가 남자 노릇을 해준다고 해도 샘이 말랐으니 받아줄 수 없지. 마르다 못해 아예 막혔어."

"합환차 한 잔 마시면 막혔던 샘도 뚫리지 않나, 허허허. 그래도 안 뚫리면 합환차를 샘에 부어 흥건하게 하면 되지."

"아이, 망측해라. 그런 소리들 말고 차나 마시고 가요."

잠시 후 왕노파가 씩씩거리며 방문을 열고 들어와 투덜거렸다.

"남자라고 하는 것들은 입만 벙긋했다 하면 음담패설이니. 밑에서 그게 잘 안 되니까 입으로만 종알종알대는 거지."

"할머니도 잘 받아넘기시던데요, 뭐. 호호호."

금련은 오랜만에 얼굴에 생기가 돌며 제법 크게 웃다가 차 마시고 있는 남자들을 의식하고는 얼른 손으로 입을 가렸다.

무대가 장사를 마치고 돌아올 즈음, 금련이 바느질감을 정리해놓고 왕노파 집을 나섰다. 해가 서산으로 지려면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다. 금련은 수의를 지어주려 왕노파 집에 다녀오겠다는 이야기를 무대에게 왜 하지 않았는지 자기 마음을 돌아보았다. 단순히 왕노파의 수의를 지어주는 일에만 신경을 쓰고 있다면 그런 이야기를 얼마든지 무대에게 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수의를 지어주러 가면서 찻집에서 남자를 만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무대에게 선뜻 그 이야기를 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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