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도 정이 안 들던 이국 마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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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우리가 이곳 미들타운 (뉴욕주)으로 이사 온지도 벌써 4개월이 되었다.
이곳은 이름 그대로 인구 4만∼5만 정도로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은 중도시이나 뉴욕시가 불과 한시간 반 정도 거리에 있고 흑인·동양인 등 적당히 섞여서 말하자면 미국의 특징이 잘 배합된, 우리가 살기에는 꽤 괜찮은 곳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곳으로 이사온 그 이튿날부터 미국의 최북단 그 춥고 외로 왔던 메인주를 그리워하게 되었다.
지금부터 3년전 아빠의 직장 관계로 불가피하게 가게된 메인주. 우리가 살던 동네는 보스턴에서 여섯 시간을 가야되고 위도로 보면 만주 어디쯤 되는지 1년 중 6개월은 눈 속에 묻혀서 떨어야하고 겨울 삼동은 춥고도 추워서 섭씨 영하 20∼30도로는 오히려 따뜻한 날에 속하였다.
가도가도 끝이 없는 숲길에 10리에 한채쯤 농가가 있고 사람들은 대개가 농군이거나 나무꾼으로 나무를 잘라 팔기도 하고 그 근처 펄프 공장에 다니기도 한다. 그곳에, 그 사람들을 위하여 병원이 있는데 아빠가 그곳의 병리과 의사로 가게 되었다.
처음 그 동네에 가서 그 고장 유사이래 처음 보는 동양인인 우리 가족은 꼭 동물원의 구경거리 정도로 보였을 것이다.
내가 시장엘 가면 특히 아이들은 처음 보는 동양 여자가 신기해서 이리보고 저리보고 얼띤 아이는 나를 쳐다보고는 무안해서 엄마 치맛자락에 숨기도 하고.
정말이지 나는 지독히도 그곳을 싫어했다.
부임한 그 다음날부터 우리는 다른 곳의 직장을 구하기 시작했고 그러나 그 직장이 그리 쉽게 되지를 않아서 결국 삼년을 그곳에 있게 되었는데 그 삼년이 그만 내 마음을 붙들고 말았는가 싶다.
지난번 떠나올 때 그 섭섭하고 미진함과 아쉬움은 나를 또 무척이나 괴롭혔다.
편하고 돈 많던 아빠 직장도 직장이려니와 결국은 우리를 동양의 귀족쯤으로 생각하게된 이웃사촌들과 마지막 차를 마시면서 나는 울뻔했다.
한국서 30세가 넘어 미국에 왔고 미국 온지 10년이 되도록 아직도 김치단지 밥솥을 들고 다니면서 왔다갔다 정신없이 사는 주제에 뭐 고향이 어디 있어서 살면 그곳이 고향이지 하겠지만 정이란 실로 들기도 어렵고 떼기도 어려운 것이구나 싶다.
새로 이사온 이곳이 아직은 낯설고 스산하고 정이 들지 않지만 나는 안다. 틀림없이 이곳도 떠날 때쯤이면 섭섭해서 또 울고 싶어질 것이라는 것을. 아니 벌써 나는 이곳이 좋아지고 있다. 이웃사촌도 생길 터이고 다행히 봄이 와주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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